[동아광장/홍찬식칼럼]문화는 신음하는데

  • 입력 2003년 4월 18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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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처음 취임했을 때 솔직히 반가웠다.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 문화부 장관이 됐으니 문화 발전을 위해 애를 쓸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었다. 과거 정치인 출신들이 문화부 장관으로 옮겨 와 ‘오페라 공연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엉뚱한 소리나 하고 종종걸음으로 정계에 복귀했던 것에 비하면 최소한 문화계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영화감독이면서 소설가라는 사실도 기대를 부풀렸다.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그가 가난한 순수예술가의 고뇌까지 이해하고 있다면 문화부 장관으로서 얼마나 큰 장점인가.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소설가’ 출신이었고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 멜리나 메르쿠리가 ‘영화인’ 출신이라는 사실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면서 그는 그 두 명이 겹쳐진 이미지로 다가왔다.

▼장관 취임 첫 작업이 ‘취재지침’▼

문화부 장관으로 첫 출근을 하던 날 그가 싼타페를 직접 몰고 캐주얼 차림으로 문화부 청사 앞마당에 섰을 때 주변의 수군거림도 없지 않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영화감독과 소설가가 일을 할 때 신사복을 입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직 문화인 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런 생각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취재지침’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식을 접하고부터였다. 문화부 출입기자 시절 문화부는 관리들이 정보를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출입처였고 지금도 그런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부는 문화를 진흥시키고 지원하는 ‘좋은 일’만 하는 곳이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취재원을 기사에 명시해야 하고 공무원들이 기자의 취재를 공보관에게 일일이 보고하는 등 부산을 떨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문화인 출신으로서 문화부 장관에 취임했으면 당연히 문화를 어떻게 진흥시키겠다는 철학과 꿈이 담긴 계획서부터 내놓을 줄 알았다. 그가 처음 한 일이 문화부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는 ‘취재지침’을 만드는 것이었다니. 이후 그가 잇따라 내놓고 있는 언론정책에 대해서는 일일이 언급조차 하기 싫다.

무엇보다 이 장관에게 실망한 것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예체능 과목의 내신반영 폐지 문제 때문이었다. 얼핏 지엽적인 문제로 보일지 모르나 문화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할 때 더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라고 확신한다. 입시교육에 밀려 무늬만 남은 예체능교육이 내신에서 배제되면 ‘모든 교육이 입시로 통하는’ 우리 현실에서 예체능 과목은 더욱 외면받게 될 것이다.

예술교육은 곧 문화교육이며 일찍부터 이뤄져야 문화 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번 방침은 문화의 싹을 자르는 일이다. 교육부가 사교육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내신반영 폐지를 주장한다면 문화부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막을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최소한 도의적인 차원에서라도 문화계를 두둔해야 할 입장이다.

이 문제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 장관이 이런 입장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문화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번 방침을 막아보기 위해 사방팔방 힘겹게 뛰어다니는 예체능 과목 교사들이 애처로울 따름이다.

요즘 문화예술단체 회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문예진흥기금이다. 문화인들이 창작활동을 펴는 데 큰 힘이 되어 왔던 문예진흥기금 모금 제도가 올해 말 폐지되기 때문에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각계를 찾아다니며 호소하고 있다. 문화부가 국고에서 연간 500억원씩 지원하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이것이 국회로 올라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므로 문화계는 안정적이고 확실한 재원을 갈망하고 있다. 이 장관이 시급하게 나서야 할 일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쌓여있는 ‘본업’은 언제 챙길까 ▼

문화 분야는 장기간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고향’이자 유일하게 잘나가던 영화계도 요즘 주춤하고 있다니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문화는 신음하는데 이 장관은 문화부 업무의 곁가지에 불과한 언론정책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과연 문화부 장관이 맞나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문화부 청사에는 ‘문화한국 문화시민’이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 장관이야말로 이 플래카드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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