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하의 새로 쓰는 한국문화]<1>“설날은 ‘낯선 날’이 아니다”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6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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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이동식
삽화 이동식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새로 쓰는 한국 문화 연재를 통해 설, 아리랑 등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해 새로운 의견과 해석을 제시한다. 한국 학계에는 특히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이규경의 오주변증설처럼 특정 주제에 대해 새 의견을 자유롭게 기술하는 전통을 이어왔다. 신 교수는 이 전통을 추종해 한국 민족문화와 민족사, 한국학의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새로운 의견을 개진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새해 첫날인 ‘설’날의 의미에 대해 한국 언론 매체들은 국민들에게 해마다 틀린 해설을 내보내왔다. 해설의 표준으로 사용한 민족문화사전의 설명이 잘못되어 있는데 여기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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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은 ‘설’이란 말은 ‘설다’ ‘낯설다’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새해에 대한 낯섦’, ‘새해라는 문화적인 시간인식 주기에 익숙하지 못한 속성을 가장 강하게 띠는 날이 바로 설날’이기 때문에 새해라는 문화적 충격이 강해서 ‘설다’는 의미, ‘설은 날’의 의미로 ‘설날’이라고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연실색할 잘못된 해설이다.

필자는 ‘설날’의 ‘설’은 ‘서다(立)’를 어근으로 하여 (새해에) ‘들어서다’ ‘서다’ ‘시작하다’ ‘처음이다’의 의미를 가진 용어라고 본다. 고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는 ‘처음 시작하다’를 ‘서다’, ‘들어서다’로 표현하는 예부터의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봄에 들어서다’ ‘봄이 시작되다’를 ‘입춘(立春)’, ‘여름에 들어서다’ ‘여름이 시작되다’를 ‘입하(立夏)’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예컨대, 명사화하면 ‘입추(立秋)’는 ‘가을에 (들어)서는 날’, ‘입동(立冬)’은 ‘겨울에 (들어)서는 날’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새해에 (들어)서는 날’ ‘시작하는 날’ ‘첫날’의 뜻이며, 구태여 ‘입춘’식 표현으로는 ‘입신세(立新歲)’의 뜻이다.

‘선날’(과거형)이라고 하지 않고 ‘설날’이라고 ‘미래형’ 표현을 취한 것은 ‘설날’이 미래 1년의 생활을 설계하여 ‘세우고’ 다짐하는 ‘미래를 세우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국전통사회의 세시풍속에서 섣달 그믐께는 온 집안의 청결과 대청소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었다. 새해를 새롭게 깨끗하게 맞기 위한 준비였다. 또한 새해 풍년과 집안의 복을 기원하여 ‘복조리’를 사서 매달아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었다. ‘설날’ 가장 중시된 풍속은 새해인사였다. 조상에 대한 새해인사가 ‘차례(茶禮)’였고, 생존한 집안 어른들과 마을공동체 어른들에 대한 새해인사가 ‘세배(歲拜)’였다.

설날 세시풍속의 독특한 것이 설 음식, 설옷, 설 그림, 설놀이 등이었다. 설 음식의 핵심이 되는 것이 흰떡 응용의 ‘떡국’이었다. 설탕이 없던 한국전통사회에서 설 음식의 단(甘) 음료로 발명한 것이 엿, 물엿, 조청, 시설(枾雪) 등이었다. 또 단 음료로 수정과, 식혜, 감주 등을 만들었다. 궁중이나 부호들은 ‘곶감’을 말렸을 때 피어나 결정된 하얀 ‘단 가루’를 털어 모아서 ‘시설(枾雪·감의 흰 눈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음식을 찍어 먹었다.

설옷은 ‘설빔’이라고 불렸는데, 어린이와 특히 젊은 여성들의 설빔은 화려하였다.

설 그림은 대체로 벽장과 미닫이문에 붙였는데 십장생(十長生), 범과 까치, 닭, 대나무, 난초 등을 그린 것이었다. 한국 십장생 그림에는 거북·학·바위·물·소나무·대나무·불로초 외에 해(태양)·구름·범(호랑이)·사슴을 즐겨 그려 넣었다. 해는 기원적으로 한국민족 공통의 숭배 대상이었으며, 범은 예(濊)족, 사슴은 부여(夫餘)족의 토템이었다.

또한 닭은 기원적으로 신라 왕족의 토템이기도 하였다. 설놀이는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썰매타기와 팽이치기가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윷놀이는 고조선·부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가족 설놀이로서 널리 행해져왔다. 윷놀이에 쓰이는 말들은 고대 부여의 관직 이름과 직결되어 있다. 부여에서는 최고관직을 저가(猪加), 구가(拘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등으로 불렀다. 여기서 ‘가(加)’는 대관(大官), 족장(族長)의 뜻이었다. 윷놀이에서 ‘도’는 돼지로서 ‘저가’에 해당한다. 윷놀이의 ‘개’는 ‘구가’에 해당한다. ‘윷’은 소의 고대어이며 ‘우가’에 해당한다. ‘모’는 말의 고대어 ‘ㅱ’ ‘ㅱ르’에서 나온 것이며 ‘마가’에 해당한다. ‘걸’은 ‘양’의 옛말이다.

한국은 1896년 1월 1일부터 ‘태양력’을 채택했는데, 그후 ‘설날’은 ‘양력설’과 ‘음력설’이 병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법(曆法) 채택의 문제이고, 어떤 역법을 채택하든지 간에 채택된 역법의 새해 첫날이 ‘설날’인 것이다. 음력설을 택했을 경우 12간지에 따라 매해를 동물로 표시하는 관습이 있었다. 2003년은 계미(癸未)년이며 양(羊)의 해라고 규정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설날’은 ‘낯선 날’이 전혀 아니라 한국인들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에 즐겁게 들어 ‘서는 날’, 새해 보람찬 삶의 설계를 ‘세우는 날’ ‘시작하는 날’이며, 새해의 삶을 희망차게 즐겁게 시작하는 약속의 ‘새날’이었다.

▼신용하 교수는…▼

신용하

1937년 제주에서 출생해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문리과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5년 서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76년부터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내년 2월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 한국 사회학회장을 역임했고 서울대 교수협의회장과 백범학술원 원장을 맡고 있다. 평생 독립운동사 등 사회사 및 사회사상사 연구에 매진해왔다. 특히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보고 역사 인식을 바로 세우는 데 헌신해왔다. 현재 ‘일제강점기의 한국민족사’ 하권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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