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리뷰]'줄리어스 시저', ‘권력’ 앞에 무릎꿇은 ‘사랑’

  • 입력 2002년 12월 2일 17시 37분


국내에서 48년만에 공연되는 ‘줄리어스 시저’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자유에 대한 이상을 압도하는 정치 현실을 보여준다./사진제공 국립극단
국내에서 48년만에 공연되는 ‘줄리어스 시저’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자유에 대한 이상을 압도하는 정치 현실을 보여준다./사진제공 국립극단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오.”

자신을 누구보다 아껴주던 시저를 살해한 후 브루터스는 로마의 시민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유일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로마’에 대한 사랑이고 로마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사랑이며 시저의 절대적 ‘권력’에 맞서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이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에서 전쟁 영웅으로 절대적 권력을 누리고 있던 시저(장민호 분)의 독재를 우려하던 브루터스(최상설 분)는 캐시어스(오영수 분)의 무리와 함께 시저를 살해하고 공화정을 지키려 했다. 그의 명분은 정당했다.

그러나 시저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했던 앤터니(김명수 분)는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며 브루터스 일파의 축출에 나선다. 힘의 향배는 시민에게 있었고 시민은 그의 선동에 따라 움직였다.

“로마를 더 사랑했다”는 브루터스의 열정적인 연설도 피투성이가 된 시저의 주검을 보여주며 군중을 흥분으로 몰아넣는 앤터니의 호소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로마의 자유와 시민의 이성은 이 감성적 선동에 무너지고 브루터스의 ‘사랑’은 ‘권력’ 앞에 무릎 꿇고 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현실은 이렇다. 영국의 사회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말했었다. “죽어서야 비로소 끝이 나는 권력에 대한 하염없는 갈망, 그것은 인간의 주된 욕망이다.” 홉스는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35년 후(1651)에 만인의 안전을 위해 만인의 권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형식의 전제군주제를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선택하고 만다. 셰익스피어는 잔인하게도 이상이 아닌 현실의 보편성을 이야기했고 그 때문에 그의 희곡은 시대를 넘어 무대에서 다시 읽혀진다.

‘줄리어스 시저’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37편 중에서도 국내에서 가장 먼저 공연(1925)됐던 작품이지만 1954년 이해랑의 연출 이후 전막 공연은 처음이다. 48년 전 앤터니 역을 맡았던 장민호가 위엄 넘치는 시저로 변한 것 또한 ‘줄리어스 시저’가 이 땅에서 보내 온 한 세월을 짐작케 한다.

약 70명에 달하는 출연진, 권력의 힘을 상징하듯 무대를 압도하는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 정치가들의 대중연설과 병사들의 전투 장면 등 오랜만에 국내 무대에 연출된 대작은 관객들을 만족시킬 만하다.

다만 한 가지.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브루터스와 앤터니의 감동적인 연설을 듣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8일까지. 평일 오후 7시, 토일 오후 4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만∼3만원. 02-2274-3507∼8

김형찬기자 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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