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강남 주부들 찜질방 토크 ´입시, 집값 그리고 뱃살´

  • 입력 2002년 11월 21일 16시 37분


사진작가 박화야씨의 사진 에세이집 ‘목욕하는 여자’(문학세계사)에서. 사진은 취재대상이 된 장소나 대화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사진작가 박화야씨의 사진 에세이집 ‘목욕하는 여자’(문학세계사)에서. 사진은 취재대상이 된 장소나 대화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대학입시에 대통령선거까지 겹쳐 연말이 더 분주하기만 한 2002년 11월. 서울 강남 일대 여성용 찜질방과 한증막 4곳에서 이곳을 찾은 주부들의 대화내용을 ‘엿듣기’했다. 정치 사회적 변화기인 요즘 ‘여론’ ‘소문’ 형성의 얼굴 없는 주역인 주부들이 바라보는 세상사는 어떤 모습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취재한 곳은 규모가 크고 지역 여성들 사이에 인지도가 높으며 식당 피부관리실 네일케어센터까지 갖춰 여성들의 체류시간이 비교적 긴 △논현동 A △삼성동 B △역삼동 C △반포동 D 찜질방 및 한증막이었다. 10월26일∼11월10일 업소마다 낮밤을 달리해 두 차례 이상씩 방문해 6시간 이상 머물거나 밤을 새우며 대화 내용을 기록했다.

드러낸 속살만큼 원색적인 수다가 오가는 이 공간에서 가장 자주 거론된 화제 3가지는 단연 교육, 다이어트, 부동산이었다.

●엄마만 믿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던 6일 오후 8시45분 삼성동 B 한증막. MBC드라마 ‘인어아가씨’를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는 무리 사이에서 죄인처럼 양손을 깍지 낀 채 무릎을 감싸고 앉은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A: 애가 반에서 몇 등이나 하는데?

B: 4, 5등쯤. 그런데 얘, 이과 보낸 게 잘못인 것 같아. 의대 치대 못 보낼 바에야 상대라도 가야 취직이 잘 된다는데 이공계 보내서 뭐하겠어? 유학은 남자친구 두고 가기 싫다고 하고….

A: 우리 아들도 걱정이야. 시험을 망쳤는지 괜히 신경질만 내더라고…. 아이가 속이 안 좋다기에 아침에 죽을 먹여 보냈는데 애 아빠가 ‘그래서 죽 쑤고 온 것’ 아니냐고 해서 싸우고 나왔어.

B: 애 아빠가 ‘아무튼 애만 입학시키면 해외 여행이나 가자’고 하더라고…. (속삭이며) 그동안 부부 생활 한번 제대로 못 했잖아.

이들은 다년간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자녀의 운전 기사로, 영양 만점 ‘도시락 요리사’로 충성을 다했던 신세 한탄부터 수능제도 자체에 대한 원망까지 오랫동안 떨떠름한 대화를 이어갔다.

한쪽 구석에서는 ‘대학 진학에는 팔자가 있다’는 주제로 또 다른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A:○○고등학교 전교 1등 애 말야, 걔는 지금까지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는 앤데 수시 모집으로 연대 상대를 갔다는 거야. 전교 2등짜리도 거기 갔대. 내가 아는 전국 30등짜리도 연대 치대 지원한다더라고. 재수생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야.

B:그보다 못한 애들이 서울대 가는 경우도 많다던데?

C:배짱 있는 애들인가 보지. 학교도 다 자기 운명이 있는 건가 봐.

A:시험 끝나고 애가 밥도 안 먹고 싸고 누웠기에 한마디 했어. “너 누구 믿어? 학교? 학원? 선생님? 엄마 제일로 믿지?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좋은 데 들어가게 할 거야. 엄마만 믿어, 응?”

●움직이지 않는 재산

10일 오후 3시15분. B 한증막 탈의실 한구석에서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여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지 한참 반가움을 표시하던 이들은 옷도 다 벗지 않은 채 이야기에 열중했다.

A:나 아는 아줌마가 IMF(관리체제) 때 은마(아파트) 팔아 이사갔는데, 얼마나 후회했겠어. 이번에 안전 진단 떨어지니까(재건축이 무산되니까) 은근히 고소해 하는 거야.

B:좋아할 것 하나 없어. 이러면 결국 강남 아파트 값 다 떨어져. ○○엄마 있잖아. 그 엄마가 나보고 돈 있으면 잠실 주공 사라고 얼마나 충고했었는데. 적어도 몇 천은 남는다고. 그런데 이제 위험해서 어디 살 수 있겠어?

8일 오후 10시반. 반포동 D 찜질방. 30∼50대로 보이는 여성 4명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A:요즘은 집에서 낮잠 자기 힘들어. 매일 다섯 통씩은 부동산에서 전화 걸려와서 제주도, 충청도 어디에 땅 사라고….

B:형님네도 그래요? 우리도 그래서 애들 보고 엄마 없다고 그러라고 하고 내가 전화받으면 일하는 아줌마인 것처럼 흉내내고 그래요.

C:그 발표(‘10·11 부동산 대책 발표’인 듯) 뒤로 더 심해진 것 같아.

A:지방에 수천 평씩 땅 살 돈이 아무나 있나? 그나저나 나는 요즘 세금 때문에 큰 걱정이야. 양도소득세가 더 비쌀지 증여세가 더 비쌀지, 그런 것 때문에. 우리 사는 집 말고 강남에 또 한 채 더 분양 받은 것 있잖아. 큰아들이 내년쯤 결혼할 텐데 팔아서 강북에 한 2억, 3억짜리 아파트 한 채 주려고 했지. 그런데 요즘에 강남 아파트에 이사오는 사람들 보면 다 젊은 부부잖아. 부모들이 나중 일을 생각해보니 월급쟁이 부부가 어느 세월에 돈 벌어서 강남에 들어와 살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 거겠지. 차라리 증여세를 내고 이 동네 아파트를 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B:세금문제는 아무한테나 물어보다가는 큰코다쳐요. 요즘은 그래서 몇 집끼리 묶어서 세무사를 고용한다던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네.

●평생 프로젝트, 아름다움.

찜질방에서 두 사람 이상 머리를 맞대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주제는 다이어트였다. 서로의 몸매를 확실히 비교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낯선 이들에게도 가식 없이 걱정을 토로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특히 다이어트에 관한 이야기는 대개 음식 조절 →운동→ 물리적인 시술로 발전하다가 토론 끝에 ‘운동이 최고’라는 결론으로 맺어지는 일정한 패턴을 보이곤 했다.

9일 오후 3시반 역삼동 C 찜질방. 40대 후반의 여성 세 명이 한증막 안에 마주 앉았다.

A:이렇게 윗배가 나와서 큰일이야. 어휴, 이것 좀 봐.

B:윗배 나온 사람이 뇌졸중(뇌중풍) 걸릴 확률이 몇 배나 높다던데….

C:뱃살 빼는 데는 줄넘기가 최고래예. 요즘은 다이어트약 먹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예. 생식이나 식이요법 이야기도 쏙 들어가고예.

B:한동안 한의원에서 다이어트 약 지어먹는 사람 많았잖아. 요즘은 차라리 다이어트 침을 맞든지 지방 흡입하러 가는 엄마들이 많더라.

A:어휴, 무서워라.

다이어트만큼 자주 등장하는 화두는 성형수술이었다. 20, 30대는 코, 40대 이상은 주름 제거가 가장 큰 현안이었다. 하지만 1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관심을 갖는 부위는 가슴이었다. 서로 낯모르는 사람의 가슴에 대해 탐색전을 벌이기도 했다.

9일 오전 2시18분 논현동 A찜질방 탈의실. 바닥에 주저앉아 화장을 하던 긴 머리의 두 20대 여성 가운데 한 명이 부분적으로 꽃무늬가 있는 흰색 시스루 팬티 하나만 달랑 걸친 채 크리스티앙 디오르백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홀터넥 블라우스를 입은 다른 한명은 휴대전화에 대고 “오빠, 기다려”를 연발했다. 화려한 속옷, 쉰 듯한 목소리, 새벽시간에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휴대전화 등으로 찜질방을 찾는 강남 유흥업소 종업원들을 구분한다는 찜질방 단골 주부들의 증언에 비추어 이들은 인근 유흥업소 여종업원으로 추정됐다.

이때 자매인 듯 꼭 닮은 40대 여성 두 명이 잠에 취한 얼굴로 탈의실에 들어섰다. 20대 여성들을 못마땅한 듯한 곁눈질로 훑어보던 이들의 시선은 마치 오목한 밥공기 두 개를 그대로 엎어놓은 듯한 팬티 차림 여성의 가슴에 머물렀다. 두 40대 여성은 탈의실에 연결된 욕탕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찜질방이 있는 다른 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A:언니, 쟤 수술한 거지? 저렇게 예뻐 보이니까 다 하나 봐.

B:좀 티난다, 얘. 우리 아랫집 아줌마도 석달 전에 했잖아. 나이가 서른일곱인데 회복이 느려서 한참 동안 남편도 못 만지게 했대. 남편 몰래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싫어하지는 않더래.

A:다 늙어서 그 가슴 누구 보여주게.

B:아랫집 아줌마 얘기로는 저런 애들한테 아저씨 안 뺏기려고 그런다던데?

A:무슨 신혼이니? 바람 피울 남자는 마누라가 예뻐도 다 피워.

두 여성은 가운 허리끈을 다시 한 번 고쳐 매고는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 쓴채 불가마로 향했다.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