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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31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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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시집 뒷 편에 붙인 글에서, 존재하지 않는 구원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 ‘비가’ 연작시를 태어나게 했다고 밝혔다. ‘비극’이라는 큰 틀 안에서 대여 선생은 단조로운 일상과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 눈물로 점철된 현실을 서정적으로 변주해 내고 있다.
28일 오후 경기 분당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붉은색 스웨터를 입은 선생은 낡아서 더 포근해 보이는 담요를 무릎에 덮고 있었다.
“당분간 시가 쓰여질 것 같지 않아요. 쓰고 싶은 것을 다 썼다는 느낌이 들어요. 계속해서 쓸만한 것도 없고…. 지난해 봄에 냈던 ‘거울 속의 천사’ 이후 1년반 남짓한 기간 동안 50여편의 시를 쏟아냈으니 이제 휴식을 해야지요. 적어도 내년 1년 정도는 푹 쉬려고 합니다.”
‘거울 속의 천사’에 묶었던 시편을 비롯해 선생의 근작시는 ‘시에서 관념을 뺀’ 무의미시 의 세계에서 한발 물러선 듯 보인다. 독자 입장에서는 읽기에 더 수월하고 편안해졌다.
선생은 “최근의 시에서 인식과 의미의 세계가 농후하게 노출됐다”며 “내가 실험했던 무의미시는 극단의 경지까지 끌고 가서 이제 더 이상은 갈 수가 없다. 그러니 의미의 세계로 돌아올 수 밖에”라고 설명했다.
-선생님의 시가 의미에서 무의미로,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초기시인 ‘꽃’의 시인으로 많이들 기억합니다만.
“‘꽃’은 관념 그 자체가 그대로 드러난 시지요. 50년대초 내가 잠깐 스쳐갔던 양식의 시입니다. 아직도 ‘꽃’의 시인으로만 보는 것은 나로선 굉장히 불만스럽고 거북해요. 그 이후 무의미의 세계를 겪고 난 다음 이제는 무의미와 의미가 적당히 혼합되어, 관념이 감추어진 상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재의 내 시세계는 ‘꽃’을 썼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지요.”
선생은 “무의미시를 극단까지 실험한 시인으로 기억됐으면 한다”고 했다.
-얼마전에 창간한 시 전문지에서 고은 선생은 ‘젊은 시인들이 가슴으로 시를 쓰지 않고 머리로 시를 쓴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요.
“가슴이란 곧 정서나 감정이겠지요. 이는 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어떻게 쓸 것인지하는 방법론도 분명 중요한 요소예요. 방법론은 머리와 관계가 있겠지요. 가슴과 머리가 잘 배합이 되야 좋은 시가 나올 가능성이 많아져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시인은 가슴만으로 쓸 수 있을지 모르지.”
선생은 “오규원 이승훈 김혜순 노향림 황동규와 같은 후배 시인들을 눈여겨 본다”고 했다. 그는 “세상 떠난 이로는 기형도의 시가 참 좋았다”고 덧붙였다.
-시와 인간적인 됨됨이를 동일 선상에 두어도 좋을까요.
“둘이 잘 조화되는 사람이 있고, 글은 좋은데 사람에게는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지요. 미당도 한민족의 정서를 섬세하게 드러낸 좋은 시를 썼지만 일제 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했지요. 미당의 시는 훌륭하지만 친일한 것은 그것 대로 따져야지, 면제해 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보들레르 역시 세계 시사(詩史)에 우뚝 선 위대한 시인이지만 아편에 중독됐고 주색을 일삼았던 그의 생활을 비호해줄 순 없으니까요.”
허전함이 시에 몰두하게 했다는 선생의 말이 마음에 무겁게 남아, 선생과 기자는 한동안 ‘헤어짐’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른 여덟 평이나 되는 아파트 거실 二人用 소파에/ 나는 혼자 앉아 있다. 멍하니/ 한나절을 그렇게 보낸다’(제25번 비가)는 선생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간단하면서도 잔인한 말이라…. 부모와 형제도 다 ‘만남’인 것을…”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