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김정태 국민은행장의 ‘경영철학이 있는 서재’

  • 입력 2002년 10월 3일 17시 12분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행장실 자신의 서가 앞에 앉은 김정태 행장. - 전영한기자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행장실 자신의 서가 앞에 앉은 김정태 행장. - 전영한기자
김정태 국민은행장은 서른세살이 되던 1980년 대신증권 상무이사가 된 후 23년 동안 사장 등 중역으로 지내왔다. 이른바 ‘출세가도’를 달려온 셈이다. 그간 그는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일과”라고 말해왔다. “사장은 굵은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실무 권한과 책임을 넘겨주고 기업 비전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는 기본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다양성과전문성을아우르는 독서

지난달 30일 찾아간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 12층 김 행장의 집무실에는 3개의 책장이 있었다. 특별히 스타일리시하지도, 커다랗지도 않아 소탈한 그의 성품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독특한 걸 읽거나 대단한 독서광은 아니다. 세상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하고 꾸준하게 책을 읽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기업가면 누구나 갖춰야 할 태도가 아닌가. 그의 책장에도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 ‘아이아코카 자서전’부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황지우의 ‘문학 앨범’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책들이 꽂혀 있었다. 황지우의 ‘문학 앨범’이라….

역시 그가 관심을 가지고 숙독하는 분야는 경영, 조직관리, 미래학에 관한 책들이었다. 그는 읽을 만한 책들에 대해 묻자 책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켄 블랜차드와 셀든 보울즈가 지은 ‘겅호!’를 빼들었다. 기업 리엔지니어링이 화두가 된 지난해 초봄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다. ‘겅호’란 한자 ‘工和’의 중국발음. 열정과 에너지를 갖고 외치는 ‘단결’ ‘파이팅’이란 뜻이다. 다쓰러져가는 공장 책임자로 발령난 여성 관리자가 공장 내에서 유일하게 활력을 인정받은 출하 부서 관리자를 모범으로 삼아 공장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실화다. “재미도 있고 잘 읽히는 쉬운 책”이라며 책을 펴보였는데 붉은 펜과 검은 펜으로 꼼꼼하게 줄이 쳐져 있거나 핵심 단어를 동그라미로 둘러놓아 얼마나 애착을 갖고 읽었는지 알게 했다.

그는 이 밖에도 피터 드러커의 경제 경영서적들을 꼽았다. ‘넥스트 소사이어티’ ‘21세기 지식 경영’ ‘지식자본주의 혁명’ ‘프로패셔널의 조건’ 등이 드러커의 책. 직원들에게 실제 읽도록 권한 책을 묻자 잭 웰치의 ‘도전과 용기’를 들었다.

그는 “항상 미래를 바라봐야 하고, 과단성 있게 행동하라는 게 이 책의 핵심”이라고 요약했다. 그에게는 웰치가 1981년 제너럴 일렉트릭(GE) 사장으로 취임한 후 지난해 퇴임할 때까지 매출액을 100억달러에서 4000억달러로 끌어올린 것보다 더 관심을 쏟는 분야가 있었다.

“웰치는 지난해 제프리 이멜트를 후계자로 공개 지명했습니다. 후계자를 정하는 풍토가 부러웠습니다. 제가 만일 은행장을 그만둘 무렵 후계자를 지명했다면 ‘건방지다’는 비난이 빗발쳤을 겁니다. 하지만 경영자의 숙명은 (경영 철학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기업의 존속성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책을 통해 ‘나와 우리’가 성찰할 포인트를 찾고 있었다.

●3곳에 분산된 서재

김 행장의 책들은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과 명동의 구 국민은행 본점 행장실, 여의도 국민은행 신사옥 행장실에 ‘분산 수용’돼 있다.

“특별한 분류법이 있다기보다는 그때 그때 사들이거나 건네받은 책들을 3군데에 나눠 보관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주 서재’ 격인 여의도 행장실에는 짙은나무색의 6단 책장이 집무 테이블 바로 뒤편에 있고, 같은 빛깔의 2단 책장이 테이블 맞은편과 창가에 놓여 있었다. 집무 테이블 뒤편의 책장에는 경제경영서와 인문 사회과학책들도 함께 있었지만 다른 책장에는 주로 경제경영서가 꽂혀 있었다.

흔히 최고 경영자의 책장에서 봄직한 하드커버의 양장본 전질은 눈에 띄지 않았으며 단행본들만 줄줄이 꽂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결제할 땐 집무 테이블보다는 주로 소파에 앉곤 합니다. 틈틈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 소파에서 책과 함께 신문을 즐겨 읽고 특히 경제면을 숙독한다. 직원들에게도 신문을 열심히 읽도록 권하고 있다. 이유는 ‘정보가 압축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비전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칼럼 읽기를 즐깁니다. 채 못다 읽은 칼럼은 스크랩해 놓았다가 시간이 날 때 읽습니다.”

●책을 통해 보는 세상의 즐거움

김 행장은 주택은행장 취임 이후 스톡옵션으로 얻은 수입만 수십억원대를 넘어가는 ‘재산가’다. 그는 스톡옵션수입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 중 가장 값비싼 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라는 답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펴낸 이 책 가격은 2만4000원.

그는 “책은 값과 관계 없이 공기(公器)다. 널리 읽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 막 다 읽은 책도 누군가 찾아와서 관심을 보이면 별 애착 없이 건네줬다”고 말했다.

그가 이 책을 구한 이유는 무엇보다 ‘재미 있기 때문’.

“‘세상의 신비’에 관한 책들, 내가 아직 찾아가 보지 못한 곳들을 알려주는 책들이 좋았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한계가 있지요. 그걸 극복해주는 게 책이 아닌가요?”

‘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는 ‘스톤 헨지의 비밀’ ‘잉카족의 마지막 피난처’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사하라가 푸르던 시절’ ‘시베리아에 블랙홀이 추락했을까’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금융업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고자 했던 사람이 피안(彼岸)처럼 여길 만한 세계를 다룬 책이다.

그는 비슷한 이유로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를 숨 돌리지 않고 읽었다고 말했다.

“90년대 초반 이집트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에 대한 호기심들은 많았지만 아직 이집트와 한국의 외교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제대로 된 현장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지요. 드문 기회를 얻은 김에 피라미드 속에까지 들어가봤습니다. 피라미드와 파라오에 대해 호기심을 감출 수 없더군요. 그때 가진 생각들을 오래 묵혀둔 차에 나온 게 ‘람세스’였습니다. 5권 되는 책이었는데, 달리기하듯 읽었습니다.”

그는 “‘골치가 아플 땐’ 가끔 관광을 떠나는 데, 그때도 풍경 좋은 곳을 찾는 것보단 내력 있는 문화유적지를 찾는 편”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그곳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들을 숙독하고 출발한다고 덧붙였다. 책은 그에게 ‘세상의 가이드’인 셈이다.

●책은 쉽고, 재미있고, 정보가 풍부해야

김 행장은 97년 환란(換亂) 이후 ‘시장 우선주의’ ‘능력 우선주의’의 길을 실천해 주목받은 이다. 그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내는 책도 ‘쉽고, 재미 있고, 정보가 많은 책이 아닐까” 하고 말했다.

그는 책을 고를 때 “우선 목차를 차분하게 살펴본다”고 말했다. 목차를 보면 그 책이 테마를 구현하기 위해 제시하는 사례나 논지를 풀어나가는 방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가 대략 짚힌다는 것이다.그런 다음 방법은 ‘발췌독’. 이미 알거나 짐작할 만한 부분들은 뛰어넘고, 새로운 정보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은 집중적으로 읽는다. 빽빽한 스케줄 속에 짬을 내서 책을 읽는 그나름의 방법이다.

그는 “부하 직원에게 책을 요약시켜 읽는 방법은 지금까지 사용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요약하는 이가 지은이 생각과는 달리 자기 뜻대로 내용을 편집할 수 있으니까요. 일단 제가 고른 책은 직접 소화해내려고 하는 편이지요.”

그는 간부 직원들이 얼마나 바쁜 지 알고 있다. “차츰 간부들의 필독서라고 생각하는 책들은 ‘국은경제연구소’에서 요약해 읽히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예 책을 못 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요.”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남 광산의 ‘시골’에서 자라던 시절 “주변에 굴러다니던 잡지라도 보이면 앞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지지 않고 읽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쏟아지는 책들 가운데 어떤 책을 골라 읽을 건지가 중요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하며 기자에게 줄 쳐진 ‘겅호!’와 로웰 브라이언의 ‘세계화 이후의 세계화’를 건넸다.

“앞으로 몇년간의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겁니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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