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씨 "친일논쟁보다 항일운동사 정립 힘써야"

  • 입력 2002년 5월 28일 18시 40분


‘이 땅에 진정한 친일파는 없다.’

소설가이자 사회 평론가인 복거일씨(54)가 ‘친일파 척결’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는 6월 초 발간될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친일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오늘날 누구 누구를 친일파로 가려내 기소하고 처벌할 법적 도덕적 근거가 없으며 이는 역사 발전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논문 내용을 요약했다.

친일 행위를 뚜렷하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은 일본 정부의 법과 관행을 따라야 했다. 심지어 민족지도자 만해 한용운 선생조차 승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병합 조약(1910년 8월)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때인 1910년 9월, 식민통치 책임자인 데라우치 마시다케(寺內正毅) 통감에게 ‘통감 자작 사내정의 전(統監 子爵 寺內正毅 展)’이라는 공식문서(탄원서)를 냈을 정도로 일본 지배는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국제 여론도 일본에 호의적이었다. 병합 3년전인 1907년 ‘헤이그 국제 평화 회의’에 이준 열사 등 3인이 고종 친서를 갖고 갔었는 데도 대표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의병 활동은 거셌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1907년 323회나 일본군과 충돌했지만 1910년엔 147회로 격감했다.

일본 지배는 철저했고 혹독했으며 길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그대로 한국에 머물렀다. 식민통치는 반세기 가까이 계속됐다고 봐야 한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조선 땅은 마하트마 간디가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없애려 했다. 문물을 강요했고 역사를 왜곡했고 말도 쓰지 못하게 했고 이름까지 바꾸라고 했다. 이 기간에 적극적 반일을 한 몇 몇을 뺀다면,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모든 조선인들이 일본 통치를 도운 셈이다. 그저 일본 제국의 국민이었다는 사실도 친일 행위가 된다.

요즘 우리가 쓰는 ‘친일’이니 ‘친일 행위’니 라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우리가 독립이 된 다음에 나온 말이다. 현재 독립 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당시 그들이 쓰지 않았던 말을 쓰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차라리 ‘친체제 행위’나 ‘친 체제파’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일본 식민통치 조직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도 재고해 봐야 한다. 당시에는 그게 합법적이었고 그렇게 하고 싶은 조선인들도 많았다. 통치 조직에 조선인들이 충원되었다는 것이 조선인들에게 해로웠다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치와 독립을 위한 첫 걸음이다. 높은 자리에 올랐던 조선인들을 골라 내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자의적 판단이다.

물론 군국주의, 천황 숭배, 역사왜곡, 조선어 말살같은 혐오스러운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통치를 찬양하는 연사들이 필요하면 어느 때나 지식인들을 징집했고 순사들이나 헌병들이 필요하면 (마음껏) 만들어 냈다. 그런 요구를 받고 거절한다면 별 탈 없이 살아 나갈 수 있었겠는가?

광복 후 지난 반 세기 우리 역사를 보자. 기업가들은 정권에 밉보이면 살아 남기 힘들었기 때문에 정치 자금이 나온 것 아닌가. 군부정권 밑에선 한번 밉보이면 누구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군부독재보다 더했다. 절대적 권력이었고 인권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국제여론이라는 것도 없었다. 사정이 이랬는데, 지금 우리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에 대해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모두 다 용감한 달걀이 되어 바위처럼 버티고 선 조선총독부 권력에 부딪치라고 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친일파에 문인들이 많은 이유

고대 생물학자들은 화석을 바탕으로 생물계를 재구성할 때 뼈 있는 생물들이 없는 생물들보다 화석들을 훨씬 많이 남긴다는 것을 고려한다. 이와 마찬가지다. 녹음이나 녹화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기록은 문헌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글을 남긴 사람들이 친일파로 많이 지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긴 일본이 1930년대 만주까지 점령하자 독립에 대한 전망은 어두워져 갔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제 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어 식민지 처지에서 벗어나 ‘내지’와 동일한 지위를 누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고뇌 끝에 이런 절망적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양심수다. 모든 재판에서 동기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어째서 친일 문제 ‘재판’에 대해선 동기가 무시되는가?

우리가 친일파를 단죄할 법적 권위를 지녔는가

어떤 사람의 행동은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을 때에만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이 있다. 선택의 문제가 없었다면 비판은 부당하다.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지금의 눈으로 친일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당시 조선인들이 행동에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 통치가 엄중하고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역설적 결론을 낸다. 그런 역설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지만 혹독한 식민의 경험을 극복하고 놀랄만한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의 성취를 스스로 깎아 내린다. 우리와 비슷한 식민지 경험을 가진 사회들 가운데 우리만큼 빨리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살 만한 사회를 이룬 경우는 드물다. 그 점에서 우리는 독보적이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사회의 귀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처리한 예를 들며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흔히들 주장하지만 그 나라들은 우리와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던 기간은 4년 남짓에 불과하고 지배 성격도 식민지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전후 부역자들을 철저히 응징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친일파니 친일 행위니 하는 개념들을 정치의 영역이 아닌 역사의 영역으로 돌려야 한다. 친일파 척결을 외치는 사람들의 이면에 어떤 상업적 정치적 고려가 있는 것은 아닌 지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그들이 정작 독립 운동가들의 업적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조국이 해방되거든, 그 때 내 유골을 조국에 묻어 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압록강변에 묻혔다는 편강렬(片康烈) 선생의 위대한 행적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민족정기를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면 아직도 허술한 항일운동사 정립에 힘을 쏟아야 한다.

식민통치 6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친일 행위들과 그런 행위들을 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덧나는 상처’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차라리 세월에 맡겨 손을 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친일 행위와 친일파 처벌이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데 긴요하다는 쾌도난마와 같은 주장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라는 물음조차 제기되지 않고 있어 이 글을 쓰게 됐다.

정리〓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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