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설가도 때론 詩心에 젖어든다 '나를 매혹시킨…'

  • 입력 2002년 4월 29일 18시 37분



소설쓰기라는 긴 장거리 주자의 고독을 견뎌내는 소설가들도 종종 이슬같이 응축된 운문의 세계를 꿈꾼다. 무릇 애송시 하나 갖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최근 출간된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 5-소설가 31인의 애송시에 얽힌 이야기’(문학사상사)는 소설가들이 문학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참 경구(警句)가 된 시들과 남다른 사연으로 얽힌 싯구절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각계 명사들이 애송시를 추천하고 사연을 담은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 시리즈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 일반 명사들의 애송시를 묶어 3권까지가 출간됐고, 4편은 ‘시인들이 뽑은 명시’로 눈길을 끌었지만 이번 5권은 ‘장르의 경계를 넘어 산문의 명수들에게 애호되는 시는 무엇일까’라는 색다른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서영은은 남편 김동리의 ‘패랭이 꽃’(파랑새 뒤쫓다가/들 끝까지 갔었네//흙냄새 나무 빛깔/모두 낯선 타관인데//패랭이 꽃/무더기져 피어 있었네)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을 고백한다.

1967년 김동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스물 네 살 처녀에게 ‘패랭이 꽃 같다’고 말한다. 왜 하필 백합 같은 꽃이 아니라 패랭이꽃일까 하고 떨떠름하게 받아들였지만, 훗날 집에 걸린 시 ‘패랭이 꽃’을 대하고서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

“패랭이 꽃은 저승 쪽에서 바라본 이승의 꽃이다. 뻗어서 만질래야 만질 수 없기에 영원히 저만치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동리를 떠나보낸 뒤의 독백과도 같은 회상이다.

문순태의 애송시는 스승 김현승의 ‘플라타너스’(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플라타너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별명이 ‘대추씨’인 김현승을 사모하던 박봉우 이성부 등 일단의 문학청년들 사이에 그도 섞여 있었다. 선생이 세상을 뜨기 전, 그는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문순태를 꾸짖는다. 제자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자 스승은 “시를 쓰듯 소설을 쓰게. 그러면 됐지.”라고 말한다.

제자는 한참 지나서야 선생의 말이 의미하는 ‘문학 속에서의 서정성의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한승원도 작가로 활동중인 딸 강에게 보내는 편지에 소월의 시 ‘산유화’(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를 동봉한다.

“작품 한 편을 끝내고 났을 때 독자들은 현학적으로 입방아질을 한다. 그러나 작가들은 누군가가 좀 더 듣기 좋게 말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소설을 쓰지 않는다. 산유화처럼 저만치 혼자서 그냥 꽃을 피우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 딸 강아, 작가의 길은 힘이 들지라도 외롭지는 않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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