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황동규의 詩속에서 예수-석가 만났다

  • 입력 2002년 3월 4일 18시 43분


시인 황동규씨(64·서울대교수·사진)는 최근 사뭇 큰 스케일의 과업을 진행 중이다. 지난 해부터 예수와 석가, 원효, 니체 등 ‘역사속의 초인(超人)들’을 불러와 얘기를 나누게 하고 있는 것.

‘문학동네’ 봄호에 실린 근작 ‘적막한 새소리’를 펼쳐본다. ‘십자가 위에 계실 때 해질 무렵 새소리가 들리던가?’라고 석가가 물으면 잠시 뒤 ‘열반하실 때 건기의 발제하(跋堤河·불타가 입적한 숲 옆으로 흐른 강) 바람이 사라수(沙羅樹) 가죽 잎새들을 말리다 말다 했던가?’라고 예수가 되받는다. 성인시편(聖人詩篇)이라고 이름할, 일련의 연작시 중에서도 이 시가 들려주는 묵직한 울림은 특히 남다르다.

작업의 성과와 의도를 묻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류의 정신사에 가장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 너나없이 효율과 업적만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을 두 성인의 대화 속에서 보여주려 했습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탐색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원효로 상징화했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니체라는 인물에 부여했지요.”

시인은 이 성인들의 대화를 연말 선보일 시집 속에 독립된 장(章)으로 엮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득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어색한 발음이 낯설었다. 최근 의치를 해넣기 위해 잇몸에 ‘임플랜트’를 세 개나 박았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근작에서는 가끔 상심(傷心)과도 같은 서글픈 멜로디가 튀어나온다.

‘살면서 잘못 식탁 밑에 떨군 숟가락까지 보이는/깊은 꿈은 슬프다/(…)/얕은 꿈, 얕은 슬픔, 숨기운마저 밑동까지 마르면/고개 숙인 수술들을 일으켜 세워/오래 연 맺었던 뿌리와/초면으로 만나리’(얕은 잠)라는 구절에 이르면 그가 요즘 빈 시간마다 옛 기억들을 하나하나 불러와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나이와 싸움을 하고 있다”는 그는 “나이에 익숙해지지 않으려는 마음의 반발심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죠. 얼마 지나면 익숙해질 지도 몰라요”하고 말했다.

말썽을 일으킨 치아도 그의 상심, 또는 반발심에 한몫을 했을까. ‘환한 불길로 타오르는 아픔을 참다보면/역시 몸에겐 지옥이 불의 아들이라는 생각’이라고 그는 ‘라쁠륨’ 봄호에 실은 ‘몸 가진 것이면’에서 표현했다. ‘아프다 보면 몸의 아픔인지, 마음의 아픔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때가 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은 어느 때보다 왕성하다. 앞에 인용한 시들을 비롯해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등 계간 문예지 봄호 네군데에 시 여섯 편을 선보였다. 4·19 즈음의 성장사를 형상화한 ‘젊은 날의 결’ 등 그의 시업에 뚜렷한 자취를 남길 듯한 장편시도 둘이나 된다.

“그것도 나이 탓이에요. 새벽잠이 없어지니 시 쓸 시간이 늘었죠”라며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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