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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2월 29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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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서른 세 살의 독신 여성 ‘유경’이다. 그녀는 직장 상사인 유부남 ‘길’에게 정기적인 섹스 상대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고 고민한다. 타인의 구속을 싫어하는 그녀에게 권위적이고 오만한 ‘길’의 존재는 부담스럽다. 그녀는 좋아했던 사촌 ‘금성’에게 상담을 요청하지만 엉뚱하게도 자위기구를 선물받는다. 결국 그녀는 ‘길’의 제의를 성욕이라는 심플한 문제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결혼과 연애에 대한 작가의 냉소는 독신 여성의 내면을 들추는 묘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레스토랑 사장, 디스플레이어, 중학교 교사, 법률회사원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경’의 친구들조차 ‘잘 생기고 돈 많은 미혼 남자’에 대한 꿈을 쉽게 접지 못한다. ‘유경’이 보기에 결혼은 동일한 계층끼리만 가능한 냉혹한 물물 교환의 세계이다.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나이든 독신 여성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난하고 무능력한 총각이 아니면, ‘1996년도식 모리스를 타고 다니’며 섹스파트너를 사냥하는 부유한 유부남 뿐이다.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나열된 배수아의 이전 소설들을 연상한다면 이 소설이 직설적으로 표방하는 연애담론 와해작전은 상당히 낯설다. ‘노동을 싫어하고 공짜를 좋아하고 험한 일을 경멸하는’ 여성들에게 일침을 놓는 대목 역시 과격하다. 그러나 가족제도에 대한 주인공의 비판적 입장은 근로 독신 여성을 차별한다는 맥락에서만 움직인다. 배수아 소설이 페미니즘의 공론과 갈라서는 결정적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이 작가가 지향하는 것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밀폐된 개인성의 세계 그 자체이다.
달콤한 로맨스에 대한 가시돋친 논평 뒤에는 고독한 삶에 대한 강렬한 찬사가 숨어 있다. 밀실의 고독은 감미롭고도 쓰라리다.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울지라도 홀로 있는 편이 행복하다. 주인공은 이른 아침 동물원을 산책하고 한밤중에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면서 절대 고독이 주는 쾌감을 느낀다.
배수아의 소설이 그리는 ‘자기만의 방’에는 고독에 대한 현대인들의 이율배반적 욕망이 담겨 있다. 누군들 가족이 거추장스럽지 않을 것이며, 황홀한 고독과 대면하고 싶지 않겠는가. 때로는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독신을 고집하기도 한다. 타인이 주는 상처로부터 초연하려는 몸짓으로 가득찬 이 소설은 자기애가 움틀 수밖에 없는 소통단절의 풍경을 보여준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싫습니다”라는 앤서링 머신의 냉담한 목소리는 타인의 벽에 이미 부딪쳐본 자의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백 지 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