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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2월 7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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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들은 아스팔트 위에 쪼그리고 앉아 허겁지겁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산더미처럼 담아주는 ‘고봉밥’이 모자라 줄을 다시 서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배식에서 식판 수거까지 모든 과정이 끝나는 데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용산역 광장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밥을 해 나르는 주부 유연옥(兪連玉·32)씨를 처음 만난 때가 3년 전이다. 얼마 전 우연히 용산역을 지나치다 비슷한 행렬을 보고 “혹시…” 하며 다가선 그 곳에 그는 여전히 있었다.
리어카가 작은 트럭으로 바뀌고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이 늘어난 변화 이상으로, 그는 지난 3년 동안 세파에 시달린 듯했다. 무슨 일일까.
“98년경 매스컴을 많이 탄 뒤 소박했던 ‘거리의 천사’ 일은 오히려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온정이 쇄도했지만 성금이 많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며 주변에서 잡음이 생겼습니다. 일이 점점 많아지자 이해를 못해주는 남편과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도대체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를 이 자리에 서 있게 만드는 힘은 뭘까. 보람? 행복? 자기확인? 혹은 이 또한 이기적인 태도는 아닐까? 어찌됐건 유씨의 경우는 “신앙심과 연민, 그리고 고집 때문”이란다.
96년1월 ‘용산역 밥퍼 아줌마’가 되기 전까지 유씨는 일찌감치 결혼해 아이 둘을 두고 작은 이벤트회사의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일하던 주부였다. 이런 유씨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행려자 돕기에 나서게 된 계기는 ‘죽음밖에 길이 없겠다’고 여겨지던 허리병을 기도로 이겨내면서 부터이다. “남은 인생은 ‘덤’이니 소외된 계층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한 것.
그 즈음 한겨울 용산역 광장에서 담요 한 장만을 덮고 잠을 청하는 팔순 할아버지를 만났다. 동상으로 발이 썩어 들어가던 그를 보살피기 위해 용산역에 출근했다. 1주일 뒤 3, 4명, 한달 뒤 6, 7명, 그가 싸오는 도시락을 얻어먹으려는 행려자가 늘어났다.
용산역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김모씨의 증언. “처음엔 도시락, 그 다음엔 밥통을 들고 나타나더라고요. 빈손으로 온 날은 우동을 사주고 그러다 아예 리어카로 밥을 나르기 시작했지요.”
97년11월 역 가까이에 3평 남짓한 취사공간을 마련하고 ‘하나님의 집’이라 문패를 달았다. 하루에 300∼400명이 찾는 요즘 오전 5시30분부터 준비하는 식사는 한달에 쌀만 15가마 분량. “이 분들을 보면 경기가 읽혀요.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직후에는 하루 600여명이 몰려왔죠. 그런데 두어달 전부터 못보던 얼굴이 늘고 있어요.”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새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힘을 주곤 한다. “오늘도 여기서 식사하던 분이 일자리를 구했다며 찾아와 2만원을 헌금했어요. 그런 게 보람이죠.”
노숙자들이 편안하게 밥 한끼 먹을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소망. 그러나 현실은 멀기만 하다. 그렇다고 그의 ‘고집’을 꺾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평생 이곳에서 그분들 밥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야 세상 뜰 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영아기자>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