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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4월 5일 19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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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양재동 ‘느티나무 재활원’에 몸담고 있는 중증장애인들은 요즘 더없이 서글프기만 하다. 인터넷사업을 통해 영글어가던 자활의 꿈이 이들의 생활터전과 함께 뿌리뽑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정연원장(60·여)과 23명의 중증장애인들로 구성된 느티나무 가족은 92년부터 양재동 공터에 가건물을 짓고 공동생활을 해오면서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산다’는 자립정신을 실천해왔다. 처음에는 쇼핑백과 비닐장갑을 수주해 만들었고 95년부터는 서초구청이 발주하는 쓰레기봉투 제작일을 맡아 연 2000만원의 토지임대료와 생활비를 마련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러나 98년 9월 조달청의 계약업체 변경으로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월 400만원 정도 들어오던 후원금마저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앞길이 캄캄하기만 했지만 자립의 꿈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길을 찾았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그들 꿈의 횃불이 됐다.
장애인 직업교육기관에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을 공부한 오화석씨(36·뇌성마비장애)와 김대수씨(36·교통사고1급장애) 등 5명이 지난해 7월 홈페이지를 만들고 프로그램 개발 관련 일을 할 수 있다는 글을 올렸다.
9월 양재동의 소프트웨어 개발회사 ㈜소금창고가 이들에게 프로그램 개발을 맡겼다. 이때부터 3개월간 느티나무 가족들은 하루 3, 4시간만 자며 일에 매달렸고 그 성과로 300만원을 받았다. 올해초 다시 600만원짜리 프로그램 개발 주문이 들어왔고 오프라인에서 꺼져가던 자립의 꿈은 온라인에서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다시 이들의 다리를 잡아끌었다. 1년여의 노력이 조그만 결실을 보는 동안 토지임대료를 내지 못했고 땅주인은 “밀린 임대료는 받지 않을 테니 나가달라”고 했다. 몇 개월 동안 이사갈 장소를 알아보러 다녔지만 중증장애인이 23명이나 살 곳을 임대해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지난달 인근 학교부지 빈터에 몰래 컨테이너 4동을 설치하고 1년만이라도 살게 해 달라고 서초구청에 사정했다. 구청측은 “이곳은 시 토지라서 권한이 없다”며 지난달 23일 컨테이너를 철거해 길가로 옮겨놓았다.
길거리로 내몰린 느티나무 가족들은 이제 다른 몇몇 재활원으로 뿔뿔이 흩어질 판이다. 그렇게 되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로 컴퓨터를 가르치고 배우며 키워온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재활원 총무인 오화석씨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돈이나 일자리가 아니라 함께 일할 수 있는 장소일 뿐”이라며 “힘들게 찾은 희망이 사라져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며 컨테이너 안에서 불 꺼진 컴퓨터 모니터를 쓸쓸히 어루만졌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