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비族 아십니까?…"벤처-주식 떼돈보다 가정-직장 중요"

  • 입력 2000년 3월 16일 19시 35분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바로 안정적인 직장과 행복한 가정, 인간적 가치다.”

벤처 붐과 주식 열풍으로 억대 연봉을 받는 직장인과 ‘주식 벼락부자’가 속출하는 직장 풍속도의 한편에서 ‘내 직장, 내 가정’에 충실한 속칭 한국판 ‘슬로비(Slobbie)족’이 등장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고액연봉을 보장받으며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는 전문직종사자들의 생활패턴이 여피족과 비슷하다면 한국판 슬로비족은 이들 못지 않은 능력을 갖추고도 상대적으로 낮은 소득을 감수한 채 자기직장을 고수하고 가정생활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국내 4대기업의 하나인 A기업 회사원 전모씨(30)는 최근 2곳의 헤드헌터(직업소개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인터넷관련 벤처기업에서 제안한 연봉은 6000만원선. 하지만 전씨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연봉 3000만원 수준의 지금 직장을 계속 다니기로 결심했다.

“기존 회사에서도 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또 당장 돈 조금 더 받겠다고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매일 자정이 돼야 퇴근하는 벤처생활보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게 나에겐 더 중요합니다.”

전씨가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이유다. 그와 같은 슬로비족들이 고집하는 원칙은 △직장을 옮기지 않고 현재 맡은 일을 충실히 한다 △주식투자 대신 저축에 힘쓴다 △하루 2시간 이상 가정에 투자한다 등.

한마디로 눈앞의 ‘돈’에 조급증을 내기보다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며 가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최근 벤처기업 2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대기업 종합상사 대리 백모씨(31)는 “주식투자로 떼돈 벌고 벤처로 스카우트돼 억대 연봉을 받는 동료 이야기가 전혀 부럽지 않다”며 “돈에 조바심을 내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될 뿐, 인간의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백씨는 새벽에 1시간씩 인터넷강좌를 듣고 주말에는 일본어 학원을 다니며 자기계발에도 힘쓰지만 휴일에는 꼭 아내와 여행을 가거나 영화를 보는 등 가정생활도 충실히 하고 있다. 주식투자 대신 입사 이후 5년간 월급을 꼬박꼬박 저축해 5000만원 이상을 모았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최근 경기분석 담당자로 와 달라는 벤처기업의 제의를 고민 끝에 거절한 모은행 대리 김모씨(32)도 “주위에 자문을 구해보니 의외로 ‘지금의 직장에 뼈를 묻으라’는 충고가 많았다”며 “벤처로 가지 않고 회사에 남은 사람들을 ‘능력없는 사람’으로 보는 이상한 풍조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슬로비족이란▼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Slow But Better) 일하는 사람’의 약칭으로 9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 80년대 미국의 신흥 부유층으로 각광받던 여피(Yuppie)족이 젊고(Young) 도시 거주자(Urban)이며 연소득 5만달러 이상의 전문직(Professional) 종사자들이었다면 이를 거부하는 슬로비족은 일확천금에 집착하지 않고 성실하고 안정적인 생활에 삶의 가치를 더 부여하는 사람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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