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핫라인]이영애, 산소같은 여자서 불꽃같은 여자로

  • 입력 2000년 2월 13일 19시 34분


탤런트 이영애(29)에게 정확히 10년간 따라붙은 ‘산소같은 여자’라는 이미지는 그에게 ‘양날의 칼’과 같다. 여배우가 소망하는 바로 그 이미지로 쉽게 톱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그만큼 행동 반경을 옭아매는 ‘유리 벽’이기도 했다.

그가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바꾸고 있다. 2주 전 시작된 김수현 극본의 SBS 32부작 수목드라마 ‘불꽃’(밤 9·55)이 그 무대다. 방송작가 박지현 역을 맡은 그는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재벌2세 약혼자 종혁(차인표 분)을 둔 채 태국 여행 중 만난 성형외과 의사 강욱(이경영)과 격정적인 ‘애정행각’을 벌이며 갈등한다. 지금까지 극중 이영애는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지닌 ‘화주’(火酒)를 연상케 할 정도로 캐릭터 구축에 성공했다는 평이다. 커리어우먼으로서 차디찬 신분상승 욕구는 재벌 2세와의 탐탁치않은 만남으로 이어졌지만 본능에 충실한 원초적인 사랑에 대한 욕구도 내부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여자….

하지만 아무래도 TV화면만으로는 그의 이미지 변신에 드는 ‘비용’(NG횟수 등)을 알 수 없기에 11일 밤8시15분 촬영 현장인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을 예고 없이 찾았다. 24일 방송분인데 마침 강욱의 약혼자인 민경(조민수)에게 애정행각이 탄로난 후 연적과 첫 대면하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김수현 드라마의 촬영 현장은 기말고사 전날 벼락치기를 위해 학생들이 모여든 독서실 같다. 표준어법을 무시하는 김수현 특유의 구어체(예를 들어 ‘∼싶고’를 ‘∼싶구’로)와 ‘스타카토’가 빗발치는 완급 조절 등을 소화하기 위한 작업은 이영애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촬영 시간 내내 대본을 무릎 위에 놓고 “나 술파는 아가씨 아니예요” 등 그날의 핵심 대사를 되새겼다.

그런데 이영애는 내내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의 매니저는 “연적에게 ‘깨지는’ 장면이기 때문”이라고 사족을 달았지만 원래 카메라만 떠나면 화사해졌던 이영애였다. 연출자인 정을영PD는 그런 이영애에게 “다음 화면 망치니까 얼굴 펴”라는 등의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영애는 이 날 NG를 내지않았다.

2시간 40여분의 관찰 끝에 기자는 평소 사람 좋고 ‘헤헤’거리던 이영애라는 여자가 정말 독하게 마음 먹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영애는 ‘불꽃’ 시작 이후 모든 인터뷰를 거절해 왔다. 촬영 현장에서도 기자들과 털털하게 얘기를 잘 하기로 유명한 그였다. 98년 9월 초순 SBS 주말드라마 ‘로맨스’의 촬영이 진행되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 기자가 찾아갔을 때 이영애는 팥빙수는 하나만 시키고 스푼을 건네주며 “같이 떠 먹으며 얘기하자”고 했었다.

이번에는 기자가 오랫동안 촬영 현장을 관찰하는 것을 지켜봤는지 이영애는 “오랜만이네요”라는 짤막한 말로 인터뷰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영애는 지금의 상황을 ‘판단 중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꼭 이미지 변신을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연기 집중을 방해하더군요. 캐릭터를 창조해 내는 것 외에는 신경을 끄고 있어요.” 아직 20% 미만인 시청률에 대한 고민도 그에게는 사치다.

김수현도 그에게 “평소에 하던 대로 하라”는 말만 건넸을 정도로 ‘불꽃’의 제작진은 이영애에게 ‘무한 자유, 무한 책임’을 던진 셈이다. “이번 주부터 본격적으로 갈등 구조가 생긴다”고 예고한 이영애는 “‘슬로우 스타터’(발동이 늦게 걸리는 사람)가 더 무서운 법”이라며 대본을 챙겨들고 밤샘 촬영이 있을 경기 용인으로 떠났다.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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