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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1월 5일 19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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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생명체를 일시적 집합체로 본다. 이같은 이른바 무아설(無我說)은 모든 물질이 원자나 소립자로 구성되었다는 물리학의 기본 원리와 흡사하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은 또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에 저것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이를 “일체의 현상적 존재는 절대적 독립성이 아니라 오직 다른 것과의 상대적 관계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고 적으면 그대로 물리학의 ‘상대성 원리’가 된다.
서울대 소광섭교수(물리교육과)가 최근 펴낸 ‘물리학과 대승기신론’에서는 이처럼 너무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물리학과 불교 사상이 하나로 승화한다. 대승기신론은 6세기경 인도에서 나온 불교이론서이며 한국에서는 혜원, 원효, 법장스님 등이 주석을 달아 대승불교의 기본 교서로 전해오다가 이번에 현대적인 감각으로 거듭난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오로지 서양과학의 패러다임만으로 중무장하고 돌아온 학자들 일색인 우리 과학계에 동양의 사상과 과학이 비집고 들어설 틈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새 밀레니엄에 걸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는 요즘 우리 과학계에 본격적인 동서양 과학사상의 접목이 싹트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물리학자이자 과학사상가인 장회익교수의 ‘삶과 온생명’(솔, 1998)에 이어 이 책은 우리 과학계가 이제 유년기를 벗어나 바야흐로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당당한 표징이다.
우리 과학계는 아직도 선진국으로부터 완제품으로 포장된 지식을 수입하기에 급급할 뿐 독자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데는 무척 서툰 게 사실이다. 다음 세기에는 문화 및 과학기술의 중심이 다시금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으로 기울게 되리라는 기대 속에 서양의 과학을 동양의 사상 틀로 재분석하는 일은 매우 값진 작업이다. 물리학자들이 물꼬를 터놓은 이 논에 다른 분야의 자연과학자들도 뛰어들어 함께 가지런히 모내기를 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최재천(서울대교수·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