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책]이정우 著「시뮬라크르의 시대」

  • 입력 1999년 5월 6일 18시 44분


★「시뮬라크르의 시대」 이정우 지음 거름 9,800원 ★

이 책은 아이러니컬하다. 저자 이정우씨는 얼마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박차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학교수를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사유를 위해 포기했다. 그리고 나서 발간한 책이 강의록이다. 이화여대에서 강사 신분으로 특강을 했고, 그 특강을 녹취하여 정리하였다. 저자는 상아탑 안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깊게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대중속으로 뛰쳐나와 쉽고 자유스럽게 `사유하는 법`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대중적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를 번역하고 해설해왔다. 하지만 이 책만큼 쉽게 풀어쓴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들뢰즈를 비롯한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사유는 난해하다. 그들은 현대성을 과거의 고전적 사유방식이 아닌 새로운 틀로 설명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의 책을 따라 읽기는 쉽지 않다.

이 책에도 그 난해함은 그대로 담겨 있다. 하지만 저자는 들뢰즈의 사유법을 자신의 말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 들뢰즈가 논파해낸 `현대를 이해하는 법`을 한국식으로 설명한다. 지금까지 들뢰즈에 관한 책 대부분은 들뢰즈의 체계 안에서 들뢰즈를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도 들뢰즈 식으로 하려 했다. 그래서 그런 책들엔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난해한 단어들이 암호처럼 난무했다. 적어도 이 책은 그런 불친절에서는 벗어나 있다.

시뮬라크르. 이 책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적 개념이다. 구태여 번역하면 `사건`이다. 이 책의 제목은 `사건의 시대`인 셈이다. 들뢰즈에게 현대는 사건의 시대이다. 고전 철학은 사건을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근대철학에서 사건이란 본질적인 어떤 것의 반영에 불과했다. 사건 뒤에 숨은 본질적인 논리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임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근대철학의 틀로 현대를 보면 이해 안될 일이 너무도 많다.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소녀들, 머리모양으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청년들, 비싼 브랜드 옷을 사기 위해 어머니를 찌르는 소년들.

이런 이해 못할 세태를 이해해보려는 사람, 현대인의 이미지에 대한 몰입과 집착 그리고 불안의 이면을 보려 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약간은 고통스러울 책읽기를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이 책은 충분히 보답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현대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그 책들의 난해함에 기가 질려버린 독자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책읽기의 경험을 선사해 줄 것이라 믿는다.

임성희<마이다스동아일보 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