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시비르스크는 서쪽의 모스크바와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천㎞씩 떨어져 있는 러시아의 「중앙기점」.
17일 오전 1시 이곳을 떠난 열차는 같은 날 아침 카자흐로 들어와 우슈토베와 알마티를 거쳐 19일 예정보다 하루 빨리 타슈켄트 북역에 최종도착했다. 이들 도시는 스탈린 정권에 의해 「강요된 생존」을 시작해야 했던 고려인들이 어디서고 열매맺는 개똥참외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한 공간.
카자흐 국경으로 들어서자 차창 밖의 풍광은 시베리아벌판을 달릴 때와는 판이했다. 숲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흙모래와 돌산이 연이어진 황무지와 짧은 풀의 초지(草地)가 펼쳐졌다.
「회상의 열차」가 카자흐로 들어와 처음 기착한 곳이 우슈토베. 유민들이 처음으로 뿌려진 곳이다. 우슈토베 한인촌을 찾은 작가 김주영씨는 아직도 남아있는 첫 이주자들의 흙웅덩이 집터를 보고 무척 놀란다. 커다란 그릇 형태로 팬 집터는 아직도 갈대지붕을 얹으면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우슈토베 이주자들은 인근 카라탈르우강가를 호미로 파 수로(水路)를 냈다. 폭 3m 깊이 2m. 강변의 갈대들이 이 물길을 따라 이주자들의 채소밭과 마을로 따라 들어와 벗이 돼주었다. 고려인 이주자들은 늪지와 황무지를 일구려고 트랙터로 고운 흙을 실어왔으며 쇠똥을 풀어넣어 소금기 많은 강물을 중화시켰다고 전해진다.
우슈토베의 아바이스키 언덕에 조성된 수백기의 한인 무덤은 자신들이 일군 광활한 목화밭을 수호신처럼 내려다보고 있다. 김주영씨는 『무덤 하나하나마다 한글 묘비명이 새겨 있어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 한국서 컴퓨터교육 지원 ▼
우슈토베에서 카자흐의 수도 알마티로 가는 길은 열차로 4시간 가량. 알마티는 「능금의 아버지」라는 뜻.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일르강 수역(水域)에 자리잡고 있다. 강제이주 이후 현재 이 도시에만 2만명 이상의 동포가 살고 있다. 고려일보 조선극장 고려말 방송국이 자리잡고 있는 중앙아시아지역 동포들의 문화중심지다.
고려일보는 원동(遠東·연해주)지역에서 「선봉」이란 제호로 발간되다가 이주한 이듬해부터 「레닌기치」로 재발간, 91년에는 「고려일보」로 개칭했다. 우즈베크의 수도 타슈켄트에서는 이주 「환갑」을 맞아 고려일보 주재기자들이 최근 「고려신문」을 창간했다.
고려일보 양원식사장은 『90년 동아일보사가 옛 소련의 동포거주지를 찾아 무대에 올렸던 민족노래극 「아리랑」이 젊은 동포들에게 불러일으킨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서울올림픽으로 한껏 고무된 젊은이들에게 우리 유민(流民)들의 애환을 고국에서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격려였다』며 『현지에서 고려일보의 역할도 이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조선극장도 연해주에서 옮겨간 것. 한때는 위구르인들의 극장을 빌려 무대를 열었다.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는 강제이주 후 이곳 극장에서 수직(守直)을 맡았다. 일부 현지인들의 조롱을 받자 그는 다섯개의 동전을 차례로 던져올려 레닌에게서 받았다는 권총으로 모조리 명중시켜 사람들의 말문을 닫았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취재진이 알마티를 찾은 18일 조선극장은 우리 정부의 1백만달러 지원으로 1천석 규모의 현대식 극장을 얻어 이사하고 있었다.
알마티 동포들과 우리 정부의 교류는 비교적 긴밀한 편이어서 교육부에서 파견한 한국교육원이 우리말과 컴퓨터교육을 카자흐 전역에서 실시하고 있다. 심영섭원장은 『카자흐와의 유대를 위해 현지인들에게도 컴퓨터교육을 실시하려고 한다』며 고국의 자재지원을 희망했다.
최종 도착지인 타슈켄트에 들어선 다음날인 20일은 우즈베크 정부와 우리 대사관이 마련한 이주 60주년 기념 대축제가 열렸다. 1백20여 민족으로 구성된 우즈베크의 고려인은 총인구의 1%인 23만명 가량. 알마티가 동포들의 문화중심지라면 타슈켄트는 동포들이 「벼농사란 이런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곳이다. 최영하 주(駐)우즈베크 대사는 『고려인들이 중심이 된 김병화콜호스(국영농장)와 폴리토젤 콜호스는 독립국가연합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농장』이라며 『우즈베크에서 선발된 30여명의 「노력영웅」 가운데 고려인이 두사람이나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노력영웅으로 2회 선출된 김병화(46년 작고)와 폴리토젤 콜호스의 황만금(96년 작고).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실험이식(移植)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생존자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강인한 자존심은 현지인들을 감화시켰다. 표트르 김 우즈베크 고려문화협회장은 『이 때문에 우즈베크와 카자흐인들은 이주해온 고려인들을 가족처럼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 政·財界 고위층 다수 ▼
현재 고려인들의 성공은 벼와 목화재배를 넘어서고 있다. 정계에는 빅토르 천 부총리, 아나톨리 조 내각법률고문, 일리아 정 의원 등이, 재계에는 아르카지 김 아사카은행장, 아나톨리 김 「누론」사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누론」은 우즈베크의 주도적 정보통신업체. 이들과 더불어 7개 계열사를 파견한 대우를 비롯, LG 삼성 등 현지 우리 기업의 존재가 고려인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하지만 우즈베크와 카자흐인들이 다수인 두 이슬람국가에서 소수 고려인들이 소외감과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90년대 들어와 두 나라가 옛 소련에서 독립하자 적지않은 고려인들이 현지 민족주의를 우려, 원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체득한 자부심과 생명력은 원동으로 떠난 이들에게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원동으로 향했다 다시 「귀향」한 김병화콜호스의 비탈리 정(42)은 『이곳은 조부모의 설움이 흙속에 묻힌 곳이다. 부모님의 피땀, 우즈베크인들의 우정이 거름으로 남아있다. 우리 가족은 60년 전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슈켄트〓권기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