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컴퓨터의 가상공간을 통해 한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성숙하고 관능적인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자기 전원이 끊기고, 얼마후에 다시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 위해 키 보드를 두드리려는 순간, 컴퓨터가 갑자기 앳된 목소리로 『나, 아파』라고, 속삭임 같기도 하고 신음소리 같기도 한, 사춘기 소녀의 독백을 들려준다면, 당신의 기분이 어떨까.
신세대 작가 배수아의 첫 시집 「만일 당신이 사랑을 만나면」(르네상스). 그의 시가 던지는 느낌이다.
소설 속에서 단지 이미지로만 존재했던, 그래서 아무런 현실의 중량감도 부피감도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배수아라는 프로그래머와 함께 현실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는 일깨움. 그 일깨움이 「확」 끼치면서 덮쳐오는 당혹감.
전원이 끓긴 사이, 순식간에 「장르」를 옮긴 프로그래머는 이렇게 읊조린다. 『내 소설,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저 외로울 뿐이야.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줘. 바보 같은 내 사랑에 대한 하소연을…』
그래서 시인의 발성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다 자란 어른의 성대에서 「철나지 않은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낸다. 사춘기 소녀의 일기 같은.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오염되지 않은. 그래서 유치한. 참을 수 없이 「센티한」. 그 지독한 유치함과 센티함을 견디면서까지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가.
「붉은 달/두꺼운 구름/모래의 화산/맨발 아래의 뜨거운 돌/끓는 바다/거기로 가서/우리 결혼하자/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우리의 결혼/지금 네 홀로 잠들어 있는/금성의 그림자 아래서」(「금성의 그림자」)
현실로부터 도망쳐서, 그래도 남는 현실의 그림자인 「그 시간」과 「그 공간」의 기억마저도 쪼개고 또 쪼개 이미지의 가루로 만들어버렸던, 그리고도 쫓기듯 지구 반대편으로 줄달음쳤던 작가. 그는 왜 갑자기 뒤를 돌아봤을까.
그의 소설을 온통 안개처럼 휩싸고 있던 이미지와 이미지. 그 사이에 서성거리며 마지막까지 도사리고 있던 그 정체 모를 결락감. 그것은 바로 현실, 「결혼」이 있는 「지구의 풍경」에 대한 것이었던가. 그러나 그의 사랑은 지금 금성의 그림자 아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부재와 상실, 그 아픔과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리워하는 것을 위해/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나는/손가락을 잘랐지. /버려도 버려도/완전한 어둠은 오지 않았지. /들리지 않았니?/내 울음/…」(「왜」중에서)
『가벼운 연애시지요. 밤중에 전화통화하듯, 실제로 전화통화도 하면서 그렇게 썼어요. 쓰고 나서야 나의 실연(失戀)은 「내 문학에도 적용되는구나」 싶더군요』
93년 데뷔한 뒤 각각 2권의 장편과 단편집을 냈다. 「이미지 안에서 이미지와 공생(共生)하는」 그의 소설은 클라이맥스가 없다. 정점에서 뛰어내리는 「해소」의 과정도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그의 손끝이 뿜어내는 정체불명의 불온한 기운에 빨려들어가 허덕인다.
왜일까. 일상의 삶에서는 얌전하게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작가의 고백에서 한꺼풀 벗겨지는 그 마력의 실체를 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고 싶다. 표범의 그 얼굴에 가까이 내 붉은 입술이 다가가면, 내 연한 뺨이 다가가면, 숨이 막혀 그만 죽어 버릴거야. 그 미칠 듯한 광기에 그만 피가 흐를 거야. 아, 지독한 맹수의 냄새…」.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