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5분다이제스트]「그대앞에 가는 길」

  • 입력 1997년 6월 10일 10시 13분


<김성아 지음/동아일보사/6,000원> 「내 고향에는 집집마다 동백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바람은 늘 동백나무 가지 위에서만 놀았고 나무 밑동 고요한 양지쪽에서는 한겨울에도 노란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났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삼다(三多)와 「4.3」의 섬 제주, 빼어난 고향 풍광을 서정적 필치로 자랑하면서 슬쩍 호흡을 가다듬는 눈치다. 화자(話者)가 희로애락의 터널을 거쳐 가슴 뭉클한 안식에 이를 것임을 암시하는 것일까. 바닷가 마을, 코흘리개 시절에 만나 꼬박 30년을 인연의 끈에 부대껴온 남자와 여자. 이들의 애증사가 파도와 섬과 흙을 터삼아 넉넉한 스케일로 펼쳐진다. 9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공모 당선작. 제주출신의 이 중년작가는 인간 소외와 구원이라는 둔중한 주제를 놓고 머리를 짓찧는다. 그리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초등학교 입학식, 자폐증 소녀와 무당 모자(母子)의 첫 대면. 소녀의 말문이 트인다. 가족에 정을 못붙인 준희와 마을의 이방인인 무당의 아들 원필. 고독을 벗삼던 계집아이는 섹스 술 담배에 절어 지내면서 후줄근한 삼십줄 교사로 늙어간다. 여인의 기억 한쪽에는 미남 대학생에서 부랑아로, 우직한 농군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원필의 인생역정이 들락날락 이어지고…. 두 주인공은 타락의 맨아래까지 떨어지고나서야 종교적 깨달음에 눈을 뜬다. 신앙고백의 혐의를 받을만한 구성. 그러나 작가는 용케 의도를 간파당하지 않고 할말을 다했다. 「절망은 곧 구원」이라는 역설의 메시지를…. 〈박원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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