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55)

  • 입력 1996년 12월 27일 21시 29분


사랑의 경지 〈2〉 상현은 전화에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들어왔다는 거 어떻게 알았는지 대학신문 동문들 망년회하는데 나오라고 연락이 왔더라구. 많이들 변했더라. 동구형만 여전히 돈 안 되는 출판사 붙잡고 있고, 홍보실 다니던 광석이는 어디라더라, 전문대 광고학과 교수가 됐어. 참, 유현석이라고 당신도 알던가? 걔도 교수 됐던데? 그 자리에서 당신 소식을 들었지. 소식을 알고 나니까 연락을 안 하고는 못 배기겠더라구』 상현의 말을 듣자 현석이 왜 마지막 만나던 날 상현의 이름을 입에 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상현이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야?』 할 때 그의 얼굴에 어리던 절망. 지금 내가 기다리는 것이 상현이 아니라 현석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므로 나는 황급히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마저 마셔버린다. 먼지가 가득 낀 작은 창으로 내다보니 길 위에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자동차의 불빛이 길게 늘어서 있다. 연말이라 차가 많이 막히는 모양이다. 상현이 이 카페로 뻔질나게 나를 만나러 다닐 때와는 교통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그때 상현은 이 카페의 뒷길로 해서 나를 하숙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골목에 주차해 있던 자동차를 지나쳐가면서 상현은 내 어깨를 꼭 안으며 헛된 맹세를 했었다. 우리 결혼하면 집은 제쳐두고 차부터 사자. 주말이 되면 만사 때려치우고 우리 둘이 발 닿는 대로 여행을 가는 거야. 가다가 바닷가 횟집에서 회도 먹고 산사에 올라가 하룻밤 자기도 하고, 또 낚시도 하자. 내가 매운탕을 끓여줄 테니까 너는 나무 그늘에서 잠만 자. 난 너를 최고로 행복하게 해줄 거야…. 상현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긴 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자기 방식으로만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 했다. 그는 화가 났을 것이다. 대체 저 여자는 왜 행복해하지 않을까. 왜 내가 사온 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안타까워하지 않는 걸까. 상현에게는 자기가 그 꽃을 단지 술김에 산 것이라거나, 꽃을 사느라 돈을 다 써버려서 새벽에 집앞에 택시를 세우고 택시비를 가지러 들어왔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여섯 시간이나 수업을 한 탓에 다리가 퉁퉁 부어서 파스를 붙이고 뒤척이고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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