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멋쟁이 할아버지

  • 입력 1996년 11월 24일 20시 11분


지난 월요일 아침이었다. 광명시에서 서울대까지 가는 121번 버스를 탔다. 개봉동 쯤이었을까. 할아버지 한분이 차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운전기사의 큰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2백50원밖에 안냈잖아요. 왜 차비를 제대로 안내고 타세요』 할아버지는 못들은 체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버스안 분위기가 심상치않게 돌아가는데 뒤쪽에 앉아 있던 한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오늘은 멋쟁이시구랴』 하며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한다. 두 분은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왜 차비를 쬐끔만 내구 타시유. 이 차가 할아버지 땜에 잘 안가잖남유. 빨리 마자 내시구랴』 『아 잔돈이 없어 그래. 천원짜리라서 못내』 그러자 할머니는 1백50원을 꺼내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할아버지의 연세는 무려 93세인데 가끔 관악산으로 놀러가곤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도 그 멤버란다. 한데 그 다음 두 분의 대화로 인해 버스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할아버지, 웬 멋을 그리 내셨수』 『오늘 마누라를 만나기루 했거든』 『마나님은 돌아가셨잖남유』 『응, 그래두 새 마누라감이 생겼거든』 할아버지의 마나님은 돌아가신지 한참 됐는데 산에서 할머니들을 사귀면 한동안 애인이라고 하다가 멀지않아 마누라라며 즐겨 만나러 가곤 하신단다. 「어머나…」. 승객들의 시선이 모두 할아버지에게 쏠렸다. 솔직히 80세도 안돼 보일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우렁우렁 정확한 목소리에 꼿꼿한 자세가 정말 기품있어 보였다. 애인에게 차 한잔이라도 사주고 싶어 버스값을 아낀 멋진 로맨스 그레이. 누가 이 할아버지의 낭만을 막을 것인가. 늙어가는 사람만큼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인간은 나이에 의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꿈과 흥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늙어가는 것이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 평 자(경기 광명시 철산동 주공아파트 1304동 10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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