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북스] “미국은 천국?…이제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8일 14시 03분


● 마당에 닭 키우고, 아스팔트 유지비 없어 자갈길 만든 미국인
● 경제위기로 구겨진 미국의 자존심 회복 가능할까?
● 미국의 현재를 폭넓게 그려내고 날카롭게 분석


"미국(美國)은 바로 천조국"

인터넷에서 젊은이들이 흔히 쓰는 얘기다. '천조국'이란 어떤 의미인가? 오래전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명나라를 지칭할 때 쓰던 표현이다. 즉 '천자가 존재하는 (높은)나라'란 의미의 '천조국(天朝國)'인 것이다.

오늘날 이 같은 극존칭의 대상은 미국이 됐다. 그런데 그 의미는 이전과 조금 다르다. 미국의 엄청난 국방비와 경제력을 빗대어 '천조국(千兆國)'이라 하는데 금액이 '1000조 원'이라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누리꾼들의 설명이다.

미국의 국방비가 1000조원에 육박한다는 얘기엔 일부 과장이 섞여있다. 실제는 7000억 달러(약 800조원) 정도다. 물론 이 정도 액수만 해도 미국 이외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다. 즉 온라인에서 사용되는 '천조국'이란 표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 그리고 경외가 뒤섞인 감정이 응축됐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젊은 누리꾼들 보다 우리나라 지식인과 정치인의 '미국 콤플렉스'가 훨씬 심하다. 미국에 일주일만 다녀온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 목소리로 미국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압도적 규모에 위축되곤 한다.

하물며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은 알게 모르게 가슴속에 미국을 향한 '존경심'을 키우기 마련이다. 근대화이후 우리가 꿈꾸던 '선진국'의 모습이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그런 열망의 실체는 '미국'을 한자로 표현할 때 '아름다울 미(美)'자로 표현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도 미국은 우리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야 할 국가인가?

2011년 8월, 미 시사주간 타임은 1달러 지폐 속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얼굴에 멍을 그려 넣은 최신호 표지를 선보여 상처받은 미국의 자존심을 묘사했다.
2011년 8월, 미 시사주간 타임은 1달러 지폐 속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얼굴에 멍을 그려 넣은 최신호 표지를 선보여 상처받은 미국의 자존심을 묘사했다.
■ "이게 우리가 알던 미국 맞아?"

"여기저기서 닭을 키우는 바람에 닭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 참을 수 없는 소음을 자아내고 닭들이 싸우는 소리에 밤잠을 설 친 주민들의 항의성 민원이 제기되자 급기야 한 가구당 닭 한 마리씩만 키우는 조례가 발동된 곳도 있다. 바로 미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LA시 이야기다."<김광기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상황은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막대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나라가 신용평가회사에 의해 '신용강등'을 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한창 진을 빼더니 이제는 밑도 끝도 없는 빚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경북대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김광기 교수는 최신작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를 통해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미국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사회적 현상을 통해 도발적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현재의 미국이 우리가 알고 있던 '아름답고 정의로운' 나라가 맞는가?"라고 말이다.

52개 꼭지로 이뤄진 이 책은 미국이 직면한 현실을 차분하면서도 가차 없이 묘사한다.

기존의 인식으로 '미국은 여유로운 중산층의 나라'였다. 물론 그것은 20세기까지의 이야기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20세기 인구의 60%가 중산층이라 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중산층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었다. 지금은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50%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전체 소득의 1%를 나눠 갖는 양극화 사회가 됐다.

2010년 4000만 명이 식비무상지원(푸드 스탬프)을 받아 미국인 8명 중 1명이 정부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다. 또한 2011년 실업률은 9%지만 이는 구직단념자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에 불과하다. 실제 2010년 실업률은 16.7%로 대공황의 수준에 근접해가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미국인들의 삶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기와 달걀을 식탁에 올리기 위해 닭을 기르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간이 닭장을 만들어 닭을 기르는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웰빙적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고속도로가 주정부의 예산부족으로 아스팔트 대신 자갈로 깔린다. 아스팔트 고속도로 유지비용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싸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인들은 덜컹거리는 길을 달릴 수 밖에 없다.

노숙자 문제는 현재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미국인 200인 가운데 1명은 노숙자이며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정부가 항공비를 대서 다른 주로 노숙자를 떠넘긴다는 등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미국의 일상적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미국의 문제는 단순한 재정위기가 아닌 사회의 총체적 부패에 있다. 2009년 9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한 시민이 ‘월가를 먼저 개혁하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동아일보 DB)
미국의 문제는 단순한 재정위기가 아닌 사회의 총체적 부패에 있다. 2009년 9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한 시민이 ‘월가를 먼저 개혁하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동아일보 DB)

■ 미국 지도층의 도덕불감증과 과도한 승자독식

"오바마 정부에는 골드만삭스 출신 관료가 하도 많아 골드만삭스를 아예 '정부삭스'라고 부른다.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보너스 잔치를 벌여 '미국의 보증 받은 사기꾼(America's Insured Grifters, AIG)' 소리를 듣는 AIG에게 오바마 정부가 채찍을 들 수 있을까…겉으로는 으르렁거리지만 모두가 쇼라는 것을 잘 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연명하고 보너스 잔치까지 벌인 그들을 규제하리라고 믿는 사람이 바보다."<'국민의 혈세로 배불린 양심불량 은행' 파트>

'미국은 없다'는 이러한 미국의 현재를 폭넓게 그려내고 날카롭게 분석한다. 미국에 대한 기존 통념에 도발적으로 도전한다. 미국은 위기라고. 경제만이 아니라 미국적 가치의 실종, 도덕불감증, 정치· 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부정과 부패가 그 원인이라고 말이다. 특히 금융권에 만연된 도덕불감증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드러난 월스트리트의 현실을 이 책은 담담하게 서술하는 것만으로 보는 이를 우울하게 만든다.

물론 여전히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며, 경제적 위기는 좋은 정책을 세우고 잘 관리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훨씬 많다.

저자는 단순한 경제위기를 넘어 미국시민의 사회의식까지 동반 타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렌터카의 기름 대신에 물을 채워 반납하거나 여분바퀴를 훔치는 등 사소한 도덕불감증부터 성병 관련 생체실험으로 최소 83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해서 최근 화제가 되었던 1940년대 과테말라 생체실험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지도층에서 벌어지는 도덕불감증은 미국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바로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가는 '탐욕'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승자독식 문화'의 확산이다.

1965년 미국 기업 CEO 월급은 평사원의 5배였으나 지금은 평사원의 300배이며,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미국이 곪아 있을 때도 월가는 스톡옵션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명문 대학 출신들이 좋은 직장에서 한탕주의를 꿈꾸고 따라서 학벌 중심 사회로 변하여 사교육이 생기는 현실이나 극심한 정경유착의 실태 등은 놀라울 정도다.

■ 더 큰 문제는 도덕성의 타락과 신뢰저하

"미국의 입법, 사법, 행정에서 공직자의 청렴의무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부정직과 부도덕이 갈 데까지 가면 한 치의 희망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과거의 미국인을 있게 한 것이 바로 최고의 가치와 도덕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기존의 가치도 없어지고 도덕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젠 탐욕만 남았을 뿐이다. 끊임없는 자기 이익 추구이다." <'부도덕' 낙인에도 끄떡없는 철면피들> 중에서

한국의 시선으로 바보면 미국의 침체는 한국에도 그리 좋은 뉴스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모델의 상당수가 다름 아닌 미국에서 기원을 두고 궁극적으로 미국을 모방하는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은 단지 미국을 겨냥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 듯 보인다. 어쩌면 '미국을 향해 가는 열망' '유사미국(Pseudo-America)'이 뿌리 깊게 각인되어 온 우리를 향한 성찰로도 읽힌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정치·경제·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양극화, 가진 자들의 집단 이기주의, 포퓰리즘 선심성 정책, 지방정부의 무능함과 무책임함, 교육비리, 도덕불감증…이 바로 미국이 현재 겪고 있으며 우리가 대처해야 할 가까운 미래라는 얘기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정리한다.

"미국의 현실은 한국과 너무 닮았다. 이제 미국을 향한 손가락질을 우리 스스로에게 돌려야 한다. 극단적인 예로 우리도 주택부양정책을 펴면서 저금리정책, 무분별한 대출, 신용카드 등으로 빚을 양산하고 있다. 자본이 심각하게 왜곡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 역시 심각한 불균형에 고민한다. 미국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과 빚을 권하는 문화, 무절제한 소비는 비단 미국 경제의 몰락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위기도 보여준다."

■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의 저자 김광기 교수

저자 김광기 교수는 미국 보스턴에서 공부했다. 미국적 사회과학은 일반적으로 치밀한 통계학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이는 과학적 방법론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대중에게 현실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김 교수는 숫자와 통계를 좋아하는 여느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주도면밀한 관찰 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곁들인 분석, 그리고 맛깔스럽고 도발적인 글쓰기를 중시한다. 주요 저작으로 'Order and Agency in Modernity' '뒤르켐&베버: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 '대한민국은 도덕적인가?'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독일 등에서도 활발하게 저작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가 미국 사회의 위기를 분석한 이유에 대해 "사랑하기에 걱정하고 있다"며 "특히 지나치게 미국과 닮아가는 한국에 경종을 울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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