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한국발령 외국인의 정착도우미 장현숙씨

  • 입력 2002년 11월 21일 16시 35분


ARM코리아의 장현숙 이사(왼쪽)가 동료 직원인 캐나다인 카를로스 산토스와 함께 고객에게 소개할 한국 정착 안내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있다./신석교기자
ARM코리아의 장현숙 이사(왼쪽)가 동료 직원인 캐나다인 카를로스 산토스와 함께 고객에게 소개할 한국 정착 안내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있다./신석교기자
ARM코리아의 장현숙 이사(39)는 미혼이다. 그러나 “수많은 자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모두 외국인 자녀들이다. 나이는 20대부터 50대까지.

장 이사의 독특한 직업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장 이사의 직업은 한국으로 발령 받아 오는 외국인들의 정착을 도와주는 일. 집 구하기부터 가재도구 사기,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물색해주고 한국에서 생활하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까지 시시콜콜 모든 일을 도와주는 ‘이주정착 서비스’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직업을 ‘유모 일(baby-sitting job)’이라고 부릅니다. 고객들에게도 ‘나는 당신들의 엄마다’라고 말하죠.”

한국에 막 도착한 외국인들은 실제로 ‘아이’처럼 장 이사에게 의존한다. 한밤중에 갑자기 아프다며 장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대응 방법을 묻는 손님들도 많다.

장 이사가 하는 일은 영어로는 ‘리로케이팅(Relocating) 매니지먼트’. 미국에서 15년 전 시작된 업종이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는 ARM(Asian Relocation Management)코리아의 고객사는 피앤지, 노키아, 시스코시스템즈 등 다국적 기업들이다.

장 이사는 영국계 기계 회사, 부산 조선비치호텔, 서울 스위스그랜드호텔 등에 근무했으며 3년 전 ARM코리아에 입사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 가르치는 일을 했을만큼의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어 업무적응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장 이사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매일 접하다보니 한국에 앉아서도 다른 문화를 엿볼 수 있어서 이 일이 좋다”고 말했다.

●한국식 아파트는 “노(No)”

출신 국가를 불문하고 외국인들이 집을 구할 때 내거는 조건은 “한국식 아파트는 싫다”는 것. 답답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주로 선택하는 동네는 고급 주택과 빌라가 모여 있는 평창동 성북동 한남동 이태원 등이다. CEO급은 성북동과 평창동의 단독주택을 선호한다. 연봉이 조금 낮은 일반 직원들은 한남동과 이태원 등지의 다세대 빌라나 유엔빌리지를 선택한다. 이런 빌라들은 그들의 생활감각으로는 ‘아파트’에 해당한다.

자녀가 있는 외국인들은 학교 문제에 민감하다. 장 이사는 “수도권의 외국인 학교가 몇 군데 안 되지만 부모들은 그나마도 꼼꼼히 따진다”고 말한다. 외국인 부모들이 주로 살피는 것은 교과과정. 특히 영국식인지 미국식인지를 자세히 살핀다. 미국식 학교는 학년별로 배우는 과정이나 난이도가 영국식 학교에 다소 앞선다. 어떤 특별 활동을 하는지도 주요 관심사.

장 이사는 “가구는 젠(禪)스타일을 선호하고 자동차는 값이 싸고 성능이 좋다는 이유로 한국 자동차를 많이 구입하는 편”이라고 밝혔다.

일을 하며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선입견도 자주 체험한다.

태어나 50여년간 유럽을 벗어나 본 적 없는 한 영국인 부부를 고객으로 만났을 때의 일이다. 부부의 눈에 비친 서울의 첫 인상은 ‘복잡하다’는 것. 차로 막히는 거리를 보면서 부부는 “이건 재앙(disaster)이야”라는 말을 반복했다. 애완견을 안고 가는 행인을 발견하자 부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저렇게 개를 안고 다니기도 하다니….”

장 이사는 “10명 중 8명의 고객은 개고기 문화에 대해 물어본다”고 밝혔다.

●용감한 독일인, 자주적인 핀란드인

민족성이 일상 생활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장 이사는 가장 모험심이 강한 민족으로 독일인을 꼽았다. 대개의 독일인들은 도착한 다음날 곧바로 차를 빌려 타고 지도를 보면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다. 장 이사는 “독일인은 기본적인 것만 갖춰 주면 나머지는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편”이라고 평가했다.

프랑스인은 까다롭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조목조목 따져서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도록 한다. 결국 마음에 들게 고쳐지면 고맙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한다.

미국인은 사소한 부분에서도 협상을 하려는 게 특징. 케이블TV 이용 요금을 깎으려는 미국인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사람들은 핀란드인. 일단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고 나면 그 뒤로는 절대 ARM에 의존하지 않는다. 집안에 하자가 생겨서 ARM에 정당하게 보수를 요구할 수 있는 부분도 한국에 먼저 온 핀란드인들에게 물어 보고 스스로 고친다.

ARM의 직원들은 이주 초기 고객들에게 서울의 구석구석을 소개한다. 관광을 시켜주는 게 아니라 병원 도서관 할인점 시장처럼 생활에 필요한 곳들을 보여준다. 동네 비디오 가게와 미장원에 가서 고객 리스트에 등록시켜주는 것도 빼먹어선 안 되는 일.

“그러는 동안 한국 문화에 자연스럽게 젖어드는 모습을 보면 자부심을 느낀다”고 장 이사는 말했다.

한 30대 호주 여성 고객은 동대문 시장 쇼핑에 관심을 갖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동대문을 찾는다. 40대 초반의 한 미국인 여성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장 이사가 안내해준 식당에서 김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외식 때 김치찌개를 주로 먹을 정도로 김치 없이는 못 사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 문화를 너무 깊숙이 받아들여 생기는 해프닝도 있다. 한 미국인은 음주 운전을 하다가 단속에 걸리자 장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돈을 주려는데 받지 않으려고 해요. 돈 받고 나 좀 보내주라고 통역 좀 해주세요.”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