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석연/´병풍´ 책임 누가 질 것인가

  • 입력 2002년 10월 17일 18시 23분


병풍수사의 핵심증거인 이른바 ‘김대업 테이프’에 실린 음성이 ‘판독불능’으로 결론났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장남에 대한 병역비리를 입증할 김도술씨의 진술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테이프가 판독불능이 되자 8월30일 김대업씨가 ‘원본’이라며 다시 제출한 테이프다. 대검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 두 테이프 모두 인위적으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 테이프의 진위여부가 병풍(兵風)수사의 관건이었음은 물론이다.

▼공모-방조자 문책을▼

한편 검찰은 이미 김씨가 제기한 병적기록표 위·변조의혹과 병역은폐대책회의 개최의혹 등에 대해 ‘혐의 없다’는 결론을 내려놓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따라서 병풍 의혹을 제기한 김씨의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난 2개월반 동안 온 나라를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병풍의 실체는 무엇이었으며, 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인가. 반성적 차원에서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검찰은 이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해야 한다. 지금까지 나타난 증거자료와 수사결과를 갖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수사를 질질 끌고감으로써 눈치보는 검찰, 정치검찰이라는 비난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김씨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게 판명될 경우 무고, 명예훼손, 또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단호하게 사법처리해야 할 것이다. 김씨의 행위에 가담해 이를 부추기거나 방조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테이프 조작의혹과 그 배경 등에 대해서는 별개사건으로 수사해 그 의혹을 밝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검찰을 이용한 정치적 책략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김씨가 수형자의 신분으로 김길부 전 병무청장을 조사하는 등 수사의 보조자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또한 명백한 위법행위다. 따라서 이를 가능케 한 검찰관계자에 대한 처벌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무자격자를 수사팀의 일원으로 수사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은 형사사법 절차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문제다. 실체적 진실의 발견은 적법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은 헌법적 요청이다. 아울러 한 정치인의 ‘병풍쟁점화 요청’ 발언으로 촉발된 ‘기획수사’ 의혹도 검찰은 철저히 밝혀야 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무엇보다 서글픈 것은 우리 사회의 분별력 상실과 정치권의 행태다. 일부 신문과 방송 등은 확인되지 않은 김씨의 행동하나, 말 한 마디를 모두 여과없이 대서특필했다. 그 장단에 맞춰 전 국민이 자신의 입지에 따라 일비일희(一悲一喜)했다. 그의 세치 혀에 온 나라가 놀아난 꼴이다. 그 과정에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편가르기와 양극화 현상이 가세했다. 국회 제1당 대통령후보의 명예와 신상에 관련된 말이 오점과 의문투성이 전력을 지닌 인사의 입에서 나왔다면 그 보도에 신중을 기하는 분별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건전한 시민사회의 상식이 아닐까.

▼무책임한 폭로 없어져야▼

특히 병풍을 둘러싸고 ‘맞고소’ ‘줄고소’로 이어진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은 가관이었다. 국가의 비전과 정책대안의 제시를 통한 선거정국은 간 데 없고, ‘테이프 정국’이 선거판을 주도함으로써 전례없던 네거티브 전략만이 맹위를 떨쳤다. 김씨를 부추겨 폭로를 하게 하거나 그 폭로내용을 공식석상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사실인 양 되풀이한 정치인들은 자신의 말에 대해 정치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김씨를 ‘의인’으로까지 치켜세운 정치인도 일이 이쯤에 이르면 한 마디 안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이번 ‘김대업 파동’을 통해 허탈과 절망감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대선을 제2의 김대업사건과 같은 폭로정국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일말의 교훈을 얻게 됐다. 무책임한 폭로를 통해 상대후보를 깎아 내리려는 유치한 전략은 아예 버리자. 불꽃튀는 정책대결과 당선 후의 사회통합 등에 대한 비전 제시를 통해 유권자들에게 참여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신바람나는 대선정국을 기대해 본다.

이석연 변호사·전 경실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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