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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8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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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래부터 정당을 비롯한 정치조직이 동료의식으로 뭉쳐진 친구들의 모임이나 신사 숙녀들의 사교클럽과 비교조차 될 수 없다면 ‘존경하는’이란 형식적 수식어에 대한 일부 여론의 반응 역시 지나치게 민감했다. 차제에 정치와 우정, 정치와 도의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짚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부패엔 엄격-사생활은 보호를▼
실제로 국내정치뿐만 아니라 국가들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도 우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정은 비정치적인 인간들의 사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국가들 사이에서, 혹은 민족들 사이에서 맺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방국’ 운운하면서 국가들간의 특수관계를 강조하려는 정치인들의 진심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특히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에 대한 세계 여론의 비판이 비등하기에 ‘우방국’이란 말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허구적으로 들릴 뿐이다.
원래 정치를 어설픈 감상주의나 도덕적 관점으로부터 분리시킨 철학자는 독일의 카를 슈미트(1888∼1985)다. 그에 따르면 정치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슈미트는 아흔이 훨씬 넘는, 그야말로 영욕이 점철된 인생을 통해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탐색해 왔는데 그의 통찰은 적나라한 정치현실에 가장 근접했다는 인상을 준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날 슈미트보다 한 걸음 더 나갈 수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정치란 적과 친구를 구별하는 행위라기보다 단지 적만을 판별해내는 작업이 아닐까.
우정이나 사랑은 자연스럽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의 발현이기에 정치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권장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종교적인 메시지로 간주되어야지 합리적으로 쉽게 납득할 만한 도덕규범이나 정치적 요구사항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과 우정은 강요되거나 요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여하튼 나는 우리 정치인들에게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사적인 차원의 도덕이나 국민에 대한 애정을 기대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효성도 없는 엉뚱한 주문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치적 부패행위가 명백한 범죄로 엄정하게 처벌되어야 한다면 사적인 차원의 사소한 사항들이나 취향에 대해서는 좀 더 관대해질 수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정치의 공적 윤리와 도덕적 순수주의에 기댄 정치적 비난의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도덕주의적 비난은 당사자의 공적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나 정치적 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로 사생활의 약점을 겨냥한다. 마치 파파라치와 같이 상대방의 약점만 훑어내 대중을 선동하는 행태는 정치를 오히려 탈정치화시킬 수 있다. 이때 ‘도덕’이란 담론 자체는 정치의 무기이자 수단으로 전락한다. 정치인 본인의 사생활은 물론 가족과 죽은 조상의 기록까지 헤집는 경우도 다반사다.
▼´도덕´감상적 잣대 버리자▼
정치에서 도덕주의적 관점을 배제함으로써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사람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키아벨리(1469∼1527)다. 그의 정치철학은 야비한 권모술수를 정치의 수단으로 정당화했다는 속칭 ‘마키아벨리즘’과 동일시될 수 없는 일련의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비르투(virtu)’란 개념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월드컵에서 보여준 민족의 단합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비르투’는 단순한 도덕적 품성을 넘어 민족의 약동하는 힘과 생명력 등을 함축한다. ‘비르투’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개념이 바로 ‘부패(corruzione)’다. 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가장 경계해야 할 요인인 셈이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엄중하게 처벌되고 제거되는 것은 마땅하지만, 무차별적 도덕주의나 어설픈 감상주의는 오히려 정치의 궁극적 목적과 배치될 수 있다. 도덕이 아닌 도덕주의의 볼모가 된 정치의 피해자는 바로 일반 국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임홍빈 고려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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