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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3월 1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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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90년대 초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문예지 ‘현대문학’을 설명하고 있는 첫 구절이다. 이어 그 사전은 두 쪽에 걸쳐 200자 원고지 10장 가까운 분량으로 ‘현대문학’을 설명하고 있다.
굳이 그 모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대문학’은 그 잡지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 현대문학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문예지다.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수많은 문예지들이 이 땅에서 피어났다 스러지는 동안에도 굳건히 존속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문학 분야의 대표성과 상징성까지 획득한 전문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폐간 위기 몰린 순수 문예지▼
특히 ‘현대문학’을 통해 우리 현대문학을 익혀온 기성의 작가들에게는 단순한 월간지가 아니라 감회 깊고 추억 어린 정신의 고향이기도 하다. 문학청년 시절 거기에는 지향할 만한 문학적 전범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자신의 작품이 끼인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감격이었다. 등단한 뒤에도 제한된 지면 때문에 거기에 작품이 실린다는 것은 여전히 선망이었으며, 그 잡지가 제정한 문학상은 문인이 맛볼 수 있는 많지 않은 영광 중의 하나였다.
‘현대문학’이 우리 현대문학에 남긴 자취도 만만히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뛰어난 많은 작가들이 그 추천제도와 현상공모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현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들이 그 지면을 빌려 발표되었으며, 시대의 첨예한 논의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근래 들어 그 ‘현대문학’이 폐간의 위기에 몰려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이든 감각으로만 이해하려드는 의식의 파행과 디지털 문화의 강력한 대두에 따른 세태 변화의 결과로 보이지만 지나쳐 듣기에는 너무 쓸쓸한 소식이다. 좀 과장하면, 우리 현대문학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는 듯한 비장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한 일은 문단을 중심으로 그런 ‘현대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진작부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점이다. 한 주간지는 며칠 전에도 ‘현대문학’을 지원 격려하기 위한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음을 전한다. 존경하는 한 선배 문인은 지난 여러 해 동안 무료로 받아 읽은 구독료를 일시불로 환산해 지불한 데다 10년 치의 구독료를 선불로 더해 애정과 성심을 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슬프고도 한심한 소식 또한 있다. 지방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는 한 시인은 얼마 전 논설에다 ‘현대문학’의 위기를 안타까워하는 글을 썼다가 일부 폭력적인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아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고 전화로 호소해 왔다. 죄목은 ‘수구반동’에다 ‘넥타이 맨 기득권층’이라는 것이었다.
짐작에는 문화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가장 비문화적인 이른바 ‘문화권력’ 논의가 여기까지 끼어든 듯하다. 발행부수 많았던 몇몇 신문처럼, 독자 많았던 어떤 작가처럼, ‘현대문학’ 또한 부패하고 남용된 문화권력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단죄의 기준은 어김없이 보혁(保革)이나 좌우(左右) 유무(有無) 같은 정치 사회적인 개념이었을 것이다.
▼˝현대문학을 살립시다˝▼
제도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오래 연륜을 쌓아가다 보면 공과도 쌓이기 마련이다. 또 정치와 사회는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을 포괄하는 것이고, 문화현상 역시 그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문화가 정치 사회적 개념을 기준으로, 그리고 그 공헌보다는 과오를 묻는 형식으로 판단되는 사회처럼 불행한 사회는 없다. 그것은 문화의 가장 저급한 정치화이며, 거기 수반되는 폭력적 운동성은 문화의 위축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기야 좋든 나쁘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퇴 소멸해 가는 문화현상을 굳이 보존하고 유지하자고 호소하는 것 또한 운동성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현대문학’의 위기를 알리고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은 그 잡지의 정치적 성향이나 어떤 사회적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 문학적 생산기능과 격려 확대장치로서의 가치를 보존하자는 문화적 호소일 뿐이다.
이문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