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52)

  • 입력 1998년 6월 24일 19시 18분


어머니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내게로 다가와 머무르는 것이 귓바퀴로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거의 그림책에 박은 채였다. ‘감동수기’도 아닌 그림책의 공주들 왕자들, 그리고 왕관을 쓴 흉흉한 새어미들 드레스와 꽃다발과 오색영롱한 왕관들…. 그림책에 얼굴을 박고 있었지만 나는 여기 아닌 ‘저기’의 일에는 사실 관심이 없었다.

심심한 오후나 저녁 내내 끈질기게 책을 붙들고 있었고 그 아름다운 내용에 가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지만, 가끔 보자기를 머리 뒤로 둘러쓰고 혼자 거울을 보며 공주놀이를 하기도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 공주는 없다는 걸.

있다해도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러니까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밀밭을 닮은 금빛 머리칼도,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소녀도, 심연처럼 푸른 눈동자와 높고 커다란 성에 사는 신비의 마왕과… 대체 그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일까.

나는 언제나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흥미를 느꼈고 대체 내가 무엇인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그때 내 주위에는 언니들이 있었다. 봉순이 언니와 미자 언니와 미경이 언니와 그리고 병식이 총각과… 어머니는 언성을 다시 낮추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얼마나 많이 맞은 거냐?

어머니가 봉순이 언니의 팔목을 잡고 내복 소매를 걷어올렸다. 그제서야 나도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 봉순이 언니의 팔을 훔쳐보았다.

멍자국들, 옹이처럼 패어 있는 검누른 자욱 그것이 불량한 인간들이 봉순이 언니의 팔목에 담뱃불을 지진 거라는 걸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때 나는 보았다. 봉순이 언니의 팔목을 들여다 보던 어머니의 자세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것을.

―내일 나랑 병원에 가자…내가 보니까 지금 칠개월이냐 팔개월이냐…. 휴우, 너무 늦어서 받아 줄 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긴 한숨을 쉬며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봉순이 언니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앉아 있었다. 나는 살그머니 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봉순이 언니가 이렇게 내 옆자리에 예전처럼 누워주기를 바랐던 날들이 있었다. 꿈속에서 가끔 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자리에 누우면서, 짱이 자니? 하고 물으면 꿈속에서 나는 일어나 말했었다. 어머, 언니 여기 있었구나. 난 언니가 날 두고 도망쳐버린 줄 알았지. 이제 아무데도 가지 마 정말.

그런데 이제 언니가 돌아왔지만 나는 뭐랄까, 소금밭에 누워 있는 것처럼 온몸이 쓰리고 불편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시간이 한번 흐르고 나면 누구도 예전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예전으로 태연히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봉순이 언니가 아무리 예전처럼 빨간 잇몸을 드러내며 씨익 씨익 열번을 웃어도 나는 이제 그녀의 웃음에 예전처럼 웃음으로 대꾸해 줄 수 없었다. 바로 그 사실이 내 몸뚱이를 쓰리게 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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