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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는 다른 불교와 무엇이 다른가.” “보스(조계종 총무원장)는 어떻게 뽑나.” “캠페인도 하나.” 불교 세계화를 위한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최근 귀국한 조계종 대표단과 미국 뉴욕 종교 지도자들의 간담회에서 나온 질문들이다. 뉴욕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등에 소속된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화의 초점은 종교적 극단주의자가 초래하는 종교 간 갈등에 대한 해법 찾기에서 한국 불교 자체로 옮겨졌다. ‘보스’ ‘캠페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조계종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당황한 기색도 보였다. 총무원장 선거에 대한 설명에 이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무문관(無門關)과 화두를 트는 간화선(看話禪) 전통이 언급됐지만 외국 종교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선불교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있는 듯했다. 사흘 뒤 뉴욕 맨해튼에서는 현지의 문화계 언론계 요식업계 관계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사찰 음식의 날’ 행사가 열렸다. 참석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좋았지만 뉴욕타임스 등 영향력 있는 매체의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3억8000여만 원의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 종단 차원의 행사라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뉴욕에서 본 한국 불교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현지의 관심은 한국 불교에 대한 이해보다는 궁금증에 가까웠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유일하게 선불교의 맥을 잇고 있다는 조계종의 자부심이 공허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총무원장 자승 스님도 의욕적인 해외 특별교구 설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해외의 사찰과 신도들을 방치한 것에 대해 사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불교의 세계화 시계는 2004년 숭산 스님이 해외 포교에 원력을 쏟다 입적한 뒤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국 불교의 세계화가 왜 중요할까. 1700여 년 역사를 가진 불교를 우리의 전통과 문화에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가 외국인들에게 가까워진다면 그것은 우리 문화가 그들의 겉이 아닌 속내로 파고들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더욱 비관적인 얘기도 있다. 현지에서 만난 한 스님은 “미국에서 한국 불교의 존재는 미미하다”며 “종교학술대회에 가면 한국 불교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서점에 가도 티베트나 일본 대만 불교와 관련된 책들은 있어도 우리 불교를 다룬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불교신도는 2007년 기준 2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신앙은 아니지만 참선과 명상 등 다양한 목적으로 불교를 접하고 있는 수련자는 2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대부분은 달라이 라마로 상징되는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대만 일본 베트남에 뿌리를 둔 불교에 속한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을 빌리지 않아도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이제까지 해외포교는 일붕 숭산 법안 도안 무량 스님 등 뜻있는 스님들의 개인적인 노력에 의지해왔다. 종단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은 거의 전무했고 외국인 신자 수는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체류 경비는 물론 용돈까지 주면서 매년 미국 대학생들을 초청하는 대만 불광산사의 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울 강남의 대형 사찰을 둘러싼 분쟁이나 자연스러운 풍경이 된 불사(공사)는 절집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세계는 한 꽃이라는 숭산 스님의 법어 ‘세계일화(世界一花)’처럼 내 집 울타리를 넘어 온 마음을 다해 남의 집을 두루 살펴야 할 때다.김갑식 문화부 차장 dunanworld@donga.com}

“참선을 수행의 근간으로 여기는 대승불교 전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한국 불교입니다. 신라시대 원효 스님부터 성철 스님까지 이어져온 이 맥을 유지하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해외특별교구 설립과 불교 세계화를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인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56)이 17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청사진을 밝혔다. 스님은 “이르면 내년 3월, 늦어도 11월까지 조계종 종법에 해외특별교구와 관련된 내용을 입법하겠다”며 “우리 불교를 영어로 이해하고 소개할 수 있는 외국인 스님을 특별 법사로 해외에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현지에는 조계종과 관련 있는 사찰이 80여 곳에 이르지만 종단 차원의 지원과 노력보다는 스님의 개인적 원력으로 유지되고 있다. 조계종은 한국 사찰음식도 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한 방안으로 여기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남방불교에서는 음식을 시주받는 탁발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사찰음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중국도 참선 수행이 없어지면서 사찰음식이 사라졌습니다.” 또 스님은 “면류를 좋아하는 스님들의 식성을 빗대 ‘문풍지에 발라져 있는 풀을 보고서도 입맛을 다신다’는 말이 있다”면서 “김치와 장 등 전국 사찰마다 다른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사찰음식이야말로 우리 불교를 거부감 없이 세계에 소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스님은 국내외 종교 간 갈등과 분쟁 해소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스님은 “2013년 한국에서 세계종교지도자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라며 “종교는 국가와 이념, 이해관계 등으로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지 종교가 분쟁의 씨앗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17일 뉴욕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만나 조계종의 국제구호활동 참여를 약속하고 19일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만나 저개발국 어린이 교육사업 지원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20일엔 현지 언론과 음식업계 인사들을 초청해 ‘한국 사찰음식의 날’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스님은 15일 로스앤젤레스 법회에서 15년 만에 법문을 했다. 이에 대해 스님은 “내 말에 책임질 수 없다는 생각에 법문을 하지 않게 됐다”며 “이번에 법문을 한 것은 해외에서 고생하는 동포들께 조금이나마 위안과 힘이 되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뉴욕=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우리는 인간의 기본권이 유린되는 수많은 도전을 직면해 왔습니다. 노예제가 그렇고 종교와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계속된 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17일 미국 뉴욕의 한 식당에서 열린 조계종 불교대표단과 뉴욕 현지 종교인의 만남에 이슬람 대표로 참석한 아이샤 알 아다위야 씨(66)의 말이다. 이 자리에는 자승 총무원장 등 조계종 스님들과 유대교단 조지프 포태스닉 랍비, 미국 성공회 클로 브라이어 신부, 가톨릭 뉴욕 대교구 케빈 설리번 신부, 북미힌두협회 우마 미소레카 씨 등이 참석했다. 외국인 종교 지도자들은 1997년 설립된 ‘인터페이스센터’를 중심으로 종교 간 대화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에 노력해온 종교인들. 이들은 9·11테러의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 인근에 이슬람 사원과 문화센터의 건립을 둘러싼 갈등과 이슬람 성전인 코란을 불태우겠다는 개신교 목회자의 주장 등 최근의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이들은 종교갈등 해결을 위해선 적극적인 정면 대응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브라이어 신부는 “특정 종교에서 타 종교에 대한 비방이나 비상식적인 행동이 일어나면 종교인 그룹이 현장을 방문해 그것은 잘못됐다고 명확하게 선언한다. 시민단체와 함께 항의하기도 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교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뉴욕=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0세기 한국 불교의 명저로 꼽히는 민속학자 이능화(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1918년)가 최근 8년간의 작업 끝에 전 8권(사진)으로 완역됐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은 순 한문 3권으로 기술된 이 책을 ‘역주 조선불교통사’라는 제목으로 최근 출간했다고 밝혔다. ‘불교총보’를 발행하는 등 불교 발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온 이능화가 저술하고 육당 최남선이 교열한 조선불교통사는 372년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뒤부터 원고가 마무리되는 1916년까지 한국 불교사를 망라하고 있다. ‘역주…’는 상편 2권, 중편 1권, 하편 3권과 색인집 등 총 8권, 6000여 쪽 분량이다. 상편은 4세기 후반 불교 전래 이후 조선시대까지 불교의 전파 과정을 통사적으로 서술했다. 중편에는 부처 열반 후 인도에서 일어난 불전(佛典) 결집, 중국에서의 불경 번역 상황, 각 종파의 연원과 신라 고려시대 고승들과의 관계 등을 기술했다. 3권으로 된 하편은 불교사상과 문화예술, 인물 등을 203개 항목의 이야기와 단편소설 2편을 통해 소개했다. 특히 이 책에는 훈민정음이 범어(梵語)에서 왔다는 주장과 석굴암 보수 공사와 관련된 입장도 실려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연구 지원을 받은 이 역주 작업에는 법산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을 연구 책임자로 효탄 스님(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김진무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 한상길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등이 참여했다. 법산 스님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는 거의 유일하게 일제강점기까지 불교 역사를 통사적으로 담은 책”이라며 “불교사는 물론이고 역사 문화 사회 등의 분야를 다루고 있어 여러 분야의 연구 활동을 위한 원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SBS는 병역 비리 의혹을 받고 있는 가수 MC몽(신동현·31)이 출연하는 ‘하하몽쇼’에 대해 19일부터 방송을 중지하기로 했다고 14일 밝혔다. SBS는 “하하몽쇼는 2회 녹화분이 남아 있지만 시청자들의 항의가 잇따라 19일부터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KBS도 MC몽이 출연하고 있는 ‘해피선데이―1박2일’과 관련해 이미 녹화한 19일 방송분은 MC몽의 출연 분량을 최대한 줄여 방영하기로 했다.}

구세군 대한본영은 한국 구세군 제23대 사령관으로 박만희 서기장관(63·사진)이 10월 3일 취임한다고 13일 밝혔다. 박 신임 사령관은 1975년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한 후 구세군 마전교회, 안성교회 등의 담임사관을 지냈고 2005년부터 서기장관을 맡아왔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죠.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최근 ‘초기불교이해’(초기불전연구원)를 출간한 각묵 스님(53·사진)은 “초기 불교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부처님이 ‘나’라는 존재를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 알음알이 등 5온(蘊)으로 간단명료하게 말씀한 것처럼 해체해 보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부처님 당시의 언어로 쓰인 팔리어 경전을 바탕으로 초기 불교의 교학과 수행체계를 설명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스님은 “초기 불교와 관련된 책은 그동안 주로 일본과 서양 서적을 번역한 것이거나 입문서들이었다”며 이번 책은 원전을 직접 번역 해설해 초기 불교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주제, 교학, 수행, 주요 술어 등 크게 4부분으로 초기 불교의 근본 진리인 사성제와 12연기법, 팔정도, 37보리분법 등을 다뤘다. 스님은 부산대 3학년에 다니다 1979년 화엄사 도광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선원에서 수행하다 1989년부터 인도 푸나대에서 10년간 유학했다. “7년간 간화선(看話禪) 위주로 참선했지만 공부에 진전이 없어 고민하다 팔리어 원전을 접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조계종의 기본 수행법은 화두를 트는 간화선이지만 초기 불교의 수행법인 위파사나와 초기 불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2002년 유학 시절 인도에서 만난 대림 스님과 초기불전연구원을 만든 후 팔리어 삼장 한국어 완역에 도전하고 있다. 2020년까지 팔리어 삼장을 완역하면 60여 권이 된다. 스님은 “최근 조계종 교육원의 스님 연수에서 초기 불교 강좌의 수강 신청자가 다른 과목의 4, 5배에 이르고 종단 차원에서 초기 불교 전문대학원 설립도 추진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 인터뷰“싸움 붙이는 게 아니라 싸움 말리려고 산에서 내려왔죠.” “싸움을 말려야 하는 종교인과 지식인이 싸움을 더욱 부추기고 있어요. 이건 아니죠.” 탁발순례와 생명공동체 운동으로 유명한 조계종 화쟁(和諍)위원장 도법 스님(61·실상사 회주)을 7일 오후 서울 견지동 조계사 내 사무실에서 만났다. 6월 화쟁위 공식 출범 뒤 일간지와의 단독 인터뷰는 처음이다. 화쟁위는 총무원장(자승 스님) 직속 기구이지만 자승 스님이 ‘봉은사 사태’와 4대강 대책 등에 전권을 부여하면서 힘이 실리고 있다. 먼저 봉은사 사태와 관련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물었다. “호랑이 그림이 될지, 고양이 그림이 될지….(웃음) 이달 말 화쟁위 안을 발표하겠지만 80∼90% 해답을 만들었고 최종적으로 도장 찍는 일만 남았다. 불교 발전과 개혁 실천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담겼고 이 과정에서 총무원과 봉은사 측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친김에 논란이 된 봉은사의 직영사찰 지정과 주지인 명진 스님에 대한 배려 안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도법 스님은 “인사 문제는 총무원 고유권한이지 우리 일이 아니다. ‘누구를 주지 앉혀라’는 식으로 제안하면 화쟁위가 권력기구가 되고 그 순간 아무 쓸모 없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화쟁위는 16일 오후 2시 조계사 내 역사박물관에서 여야 사무총장, 정부 고위 관계자, 비정부기구(NGO) 대표가 참여하는 4대강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다. 불교환경연대 등 불교계의 여러 단체가 4대강 개발을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어 이미 방침이 정해진 것은 아닐까. “4대강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됐는데 무조건 ‘4대강을 덮자’ ‘백지화하자’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명(名·명분)과 실(實·실제)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 아닌가. 화쟁위는 양측 사이에서 조정하고 균형을 잡는 지렛대 역할을 하겠다.” 불교계의 대표적인 대화론자인 스님은 1994, 98년 종단 분규가 있을 때 사태 수습을 위해 적극 나서기도 했다. 일각에서 스님의 최근 ‘구원투수’ 역할에 대해 “도법 스님, 대체 뭐 하나” “변절했다”는 얘기도 있다며 거북한 질문을 던졌다. “난 그런 말에 관심 없다. 항상 대안이 뭘까 고민하며 살아왔다. 종단 사태 때는 타의가 더 컸지만 이번에는 내가 마음을 냈다. 간디의 제자 비노바 바베는 설득과 대화로 토지를 헌납 받아 나눠주는 운동을 했다. 그는 상대에게는 반드시 열고 들어갈 ‘문’이 있다고 했다. 그 문을 지혜와 인내력으로 찾아야지 입장이 다르다고 지금의 우리처럼 부수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스님은 이어 이념과 지역, 이기주의 때문에 갈라진 사회에 깊은 아쉬움을 표시하면서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의 화엄(華嚴)적 세계에서 우주, 지구, 인간은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공동체다. 이를 무시하고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 투쟁하는 것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시대 상황에 맞춰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든 진보든,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걸림돌이 된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군대 안 가려고 정신질환자 행세를 하더니 이번에는 일부러 다쳤다? 실력은 세계 정상급인데 양심은 뒤틀린 비보이들이 무더기로 병역법 위반 등으로 불구속 입건됐다. 고난도 춤동작을 하루 2∼3시간씩 연습하며 어깨에 무리를 줬고, 그것도 모자라 무거운 물건만 골라 들었다.■ 도법 스님 “싸움 말리러 왔다”조계종 화쟁위원장인 도법 스님(사진). 가장 잘하는 일은 걷는 것이라고 했다. 시골사람이자 그곳의 작은 일만 챙겨온 첨단사회의 ‘수공업자’라고도 했다. 이제 스님은 세상사의 싸움을 말리는 또 다른 길에 서 있다. 스님의 걸망에 든 것은 대립된 것을 조화시키는 원효 스님의 화쟁(和諍)사상이다. ■ 8·29 부동산 대책 후 열흘, 시장에선‘8·29 부동산 대책’이 나온 지 2주째가 돼 가지만 부동산시장의 반응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반짝 열기를 보이는 곳이 있는 반면 냉랭한 분위기가 여전한 곳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정부 대책이 얼어붙은 부동산시장을 녹일지 가늠할 수 있는 때를 추석 연휴로 꼽는다.}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사진)이 7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4세. 고인은 1936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1966년 대순진리회에 입도해 대진대 이사, 대진의료재단 이사장, 민족종교협의회 이사 등을 지냈고, 1995년부터 종무원장을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예자 씨와 연천 규천 은영 씨 등 2남 1녀가 있다. 장례는 종단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경기 성남시 분당제생병원, 발인은 11일 오전 6시. 031-781-6721}

사전 통보 없이 잇따라 방송 녹화를 ‘펑크’낸 방송인 신정환 씨(35·사진)가 필리핀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7일 확인됐다. 이날 방송사와 소속사 등에 따르면 신 씨는 5일 진행된 MBC 추석 특집 예능프로그램과 6일 KBS 2TV ‘스타 골든벨 1학년 1반’ 녹화에 사전 통보 없이 불참한 데 이어 7일 MBC ‘꽃다발’ 녹화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 바람에 신 씨가 한인 대부업자에게 여권을 맡기고 자금을 빌려 도박하다 돈을 잃는 바람에 억류돼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 영사담당 관계자는 “신 씨가 지난달 27일 필리핀으로 출국해 현재 세부 섬에 있는 한 카지노 호텔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면서 “현지 영사관이 신 씨와 통화한 결과 서울의 소속사와 갈등이 있어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현재 억류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서민전용 대출 상품 햇살론이 너무 높은 인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도입 한 달여 만에 연간 대출한도의 4분의 1이 넘는 대출이 이뤄지면서 올해 말에는 한도를 초과해 자칫 대출 중단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과열 조짐을 보이는 햇살론의 문제점과 대책을 살펴봤다. ■ 오현섭 뇌물 리스트 ‘오발탄’ 후폭풍요즘 전남 여수시에서는 “오발탄(吳發彈)이 오발탄(誤發彈)이 됐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구속된 오현섭 전 여수시장이 여기저기 건넨 돈이 탈이 나고 있다는 것을 비꼬는 얘기다. 나아가 오 전 시장이 정치권 인사들에게 공천헌금을 상납했다는 ‘오현섭 리스트’까지 나돌고 있다. ■ 서강대 교수 진흙탕 싸움 왜?서강대가 동료 교수의 연구비 횡령을 고발한 교수들에 대해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일부 학생과 교수들에게서 이들로부터 협박과 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횡령 혐의가 일부 드러난 가운데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보복으로 비칠 수 있는 이 문제로 학교가 술렁이고 있다. ■ 미국 경기부양책 뭘 담을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사진)이 이번 주 경기회복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추가적인 경기부양책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부양책은 임기 초와는 달리 대규모 재정지출 같은 ‘돈 더 쓰는’ 정책보다는 세금 감면 등 ‘돈 덜 걷는’ 정책이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의 환심을 사야 하는 다급함도 깔려 있다. ■ “집시 대신 사르코지 추방” 佛시위집시 추방에 반대하는 대규모 연대 시위가 4일 프랑스 전역과 유럽 주요 대도시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시위에는 좌파의 거물들뿐만 아니라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의 애인이었던 영국 출신 배우 겸 가수 제인 버킨, 영화감독 아녜스 자우이 등 저명 연예인도 참여해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의 정책을 비난했다. ■ 프로축구 칭찬 리더십 ‘골인’‘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나.’ 올 시즌 K리그에서 몰라보게 달라진 두 팀을 보면 과연 칭찬의 효과는 강했다. 만년 약체에서 강팀으로 거듭난 제주 유나이티드와 전반기 바닥까지 추락했지만 최근 패배를 모르는 팀으로 바뀐 수원 삼성. 이들의 ‘환골탈태’엔 바로 칭찬 리더십이 있었는데…. ■ 26일 은퇴하는 전광표 구세군 사령관 구세군을 만난 지 50여 년, 아내와 같은 구세군 사관으로 ‘복무’한 지 40년. 26일 은퇴하는 전광표 구세군 사령관(사진)이 196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 구세군의 변화와 더불어 자신의 삶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구세군 인생은 50점밖에 안 된다며 스스로를 낮춘 그는 앞으로도 ‘마음은 하나님에게,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구세군 모토대로 살고 싶다고 했다.}

“누나, 기도가 뭐야.”“이렇게 잠시 눈 감고 묵념하면 돼.”“얼마나?”“음, 10초 정도.” 1953년 충남 논산시 연산면. 까까머리의 깡마른 중학 1학년생은 난생 처음 온 ‘예배당’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네 살 위 누나에게 물었다. 소년은 누나 몰래 이곳에 오면 누나가 놀라기도 하고 좋아할 것 같아 밤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한두 번 지나친 교회와도 다르고, 목사님(담임 사관)은 군복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로부터 16년 뒤 소년은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2005년에는 한국 구세군의 총책임자인 사령관이 됐고 26일 5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구세군 현역에서 은퇴한다. 그가 전광표 구세군 사령관(69)이다. 그를 2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구세군빌딩에서 만났다. 전 사령관과 결혼한 뒤 40년간 구세군 사관으로 지낸 동갑내기 부인 유성자 여성사업총재도 자리를 함께했다. ● 소년, 구세군 사관이 되다 누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구세군 교회에 처음 갔던 소년은 1969년 3월 결혼 뒤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하지만 누나는 그의 곁에 없었다. “하늘나라에 계시죠. 지병이 있었는데 (내가) 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걸 못 봤어요. 신앙과 삶에서 어린 내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50여 년 전 추억을 더듬던 그는 “두 조카도 사관으로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관학교를 나온 뒤 그는 서울 서대문구 천연 영문(營門)의 담임 사관이 됐다. 영문은 다른 개신교단의 교회이고 담임 사관은 목사에 해당한다. 서민은 물론 목회자도 끼니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다. 그는 첫 부임지에서 큰아들을 등에 업은 부인과 함께 서민아파트의 문을 두드리며 선교를 시작했다. “요즘과 비교할 때 구세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기였죠. 제복을 입은 부부가 젖먹이를 데리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니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났죠.(웃음) 전임자가 나이가 많은 사관이었는데 그분은 거리에서 구세군을 알리기 위해 북을 치며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했어요.” 시간이 흘러 구세군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고 선교 방식도 달라졌다. 하지만 그는 ‘영혼 구제’를 위한 선배 사관들의 열정은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 자선냄비의 법칙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조셉 바아 사관이 첫 종을 울린 뒤 자선냄비는 구세군의 상징이 됐다. 첫해 모금 당시 848환(현재 가치로 약 850만 원)이었던 모금액이 지난해에는 37억 원에 이르렀다. 그는 40년간 자선냄비를 통해 변화하지 않는 구세군 정신과 또 변화하는 사회의 얼굴을 함께 지켜봤다고 말했다. “자선냄비 모금 활동은 2인 1조로 움직입니다. 사관생도 초년병 시절 모금이 끝난 뒤 선임자가 없어 혼자서 자선냄비를 들고 왔더니 난리가 났어요. 자선냄비는 그 어떤 경우에도 혼자 들고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데 그걸 몰랐던 겁니다. 자선냄비에는 큰 자물쇠와 좁은 구멍밖에 없지만 어떤 의문이나 의혹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자선냄비입니다.” 그가 경험으로 체득한 자선냄비의 법칙이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른 10명 중 8, 9명은 아이들의 손에 돈을 쥐여 기부하도록 한다. 2000년 이전에는 날씨가 전날보다 춥거나 눈이 오면 모금액이 올라갔다. 최근에는 차량 이용이 많아지면서 거리를 걷는 행인들이 적어져 이 날씨 법칙은 안 맞기도 한다.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울 때는 모금액이 오히려 늘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나 2008년 금융위기 때 모금액이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늘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자선냄비는 펄펄 끓었어요.’ 그걸 보면서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우리의 힘과 희망이란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익명의 고액 기부자가 늘어난 것도 변화다. 그는 “공개할 수는 없지만 한 의사는 매년 고액의 수표 여러 장을 1000원짜리로 감싸 자선냄비에 넣는다”면서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은 모르게 하는 자선냄비 천사들이 많다”고 덧붙였다.“외환위기때나 2년 전 금융위기때 거리 모금액 오히려 늘어 교회의 대형화보다는 소외된 이웃과의 나눔이 더 많아져야”● 구세군 인생 그는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2008년 10월 열린 구세군 선교 100주년 행사와 한국을 거쳐 간 외국인 사관 초청 행사를 꼽았다. “행사에 참석한 원로 여사관이 갑자기 품에서 빛바랜 태극기를 꺼냈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100년 된 태극기였습니다. 2대에 결쳐 한국을 기억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던 거죠.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더 보관할 수 없으니 맡긴다’고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이 태극기는 지금 구세군 박물관에 있습니다.” 1971년 사관학교를 졸업할 당시 그의 기도는 “좋은 사관, 훌륭한 사관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관이 좋은 사관인지 물었다. 그는 “주님이 원하는 뜻대로 일하는 구세군”이라고 답했다. 다시 그에게 스스로 구세군 인생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전 사령관은 웃으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았겠죠. 보통이나 중간, 그러면 50점”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 총재가 거들었다. “구세군으로는 인간이니 100점은 말이 안 되고 95점, 남편으로는 80점입니다. 일에 시달려서 그런지 몰라도 집에서는 좀 찬 편이에요.” 구세군은 부부가 결혼한 뒤 같이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이후 함께 활동하도록 돼 있다. 유 총재는 “사령관을 만났을 때 이미 구세군으로 평생 살겠다고 결심한 상태라 두 번째 데이트부터 결혼을 전제로 사귀다 한 해 뒤 결혼했다”며 “24시간 거의 함께 지내니 일거수일투족을 너무 잘 아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했다. 2007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을 지낸 전 사령관은 구세군을 포함한 개신교계 전체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구세군 사역의 두 축은 영혼구제와 사회구제활동인데 ‘마음은 하나님에게,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모토에 충실했다고 자부합니다. 또 어떤 면에서 사회활동이 더 부각된 면이 있습니다. 다른 교단의 일은 언급하기 쉽지 않지만 어쨌든 교회의 대형화보다는 소외된 이웃과의 나눔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합니다.” 두 사람은 은퇴라지만 현직에서 물러날 뿐이지 기도와 봉사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평생 간직해온 마음속의 성경 구절을 꼽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셨으니.”(마태복음 22장 37∼38절)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구세군::영국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가 1865년 영국 런던의 슬럼가에서 가난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구제(救濟)하기 위해 ‘기독교선교회’를 창설한 것이 구세군의 출발점이다. 1878년에는 더욱 강력한 활동을 위해 명칭을 구세군(The Salvation Army)으로 바꾸고 조직을 군대식으로 만든다. 런던에 본부를 둔 구세군은 세계 120여 개국에서 활동하고 있고 각국의 구세군은 역사와 신자 수 등에 따라 군국과 준(準)군국으로 구별된다. 한국 구세군은 군국으로 인정받고 있고 사령관 아래 9명의 지방장관을 두고 있다. 각 군국의 최고지도자는 사령관으로 불리고, 계급으로는 통상적으로 부장(副將)이 된다. 구세군 성직자는 사관 호칭을 쓰며, 그 계급은 부위-정위-참령-부정령-정령-부장으로 올라간다. 세례를 받은 평신자는 하사관인데 부교와 정교로 구분한다. 한국 구세군은 10만여 명의 신자에 274개 영문이 있고, 1500여 개의 전문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품위 있게 행동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강력범죄의 이면을 파헤쳐온 저자의 물음에 대한 미국 연방수사국(FBI) 프로파일러의 답변은 의외로 희망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프로파일러 인터뷰를 통해 연쇄살인범들의 수법과 프로파일링 기법들을 쉽게 재구성했다. 동아일보 사건팀 기자와 데스크를 거친 편역자의 유영철 강호순 등 국내 범죄에 대한 사례 분석도 실려 있다. 범죄의 기록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어두운 얼굴을 읽을 수 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목회자인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가 2일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지병으로 소천(召天)했다. 향년 72세. 2006년 폐암 초기 진단으로 수술을 받은 뒤 최근 항암 치료 중 폐렴 증세를 보여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1938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사랑의교회를 개척해 재적 교인 8만 명의 대형 교회로 성장시킨 뒤 2003년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목사 자리를 물려주고 정년을 5년 앞당겨 은퇴했다. 대형 교회의 교회 세습 문제가 사회적 논란으로 부각된 가운데 이 결정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때 ‘사랑하는 교우들에게’란 글을 통해 “대형 교회가 한 세대 지나면서 더는 기대할 것 없는 고목처럼 되어 버리는 비극을 많이 보았다”며 “교회는 흥하고 옥 목사는 쇠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고인은 생전에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 지도자로 명설교자이자 평신도 신앙 훈련에 열성적인 목회자였다. 설교를 십자가에 자주 비유했지만 균형 잡힌 성경 해석과 통찰력, 기품 있는 설교로 ‘설교의 모범답안’으로 불렸다. 2005년 CBS가 한국기독교선교 120주년을 기념해 시행한 조사에서는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원로목사로 물러난 뒤에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명예회장 등으로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위해 노력했다. 유족으로 부인 김영순 씨와 3남. 장례는 5일장이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분향소는 서초동 사랑의교회, 경기 안성시 양성면 사랑의교회 수양관. 발인은 6일 오전 11시 사랑의교회, 장지는 사랑의교회 수양관. 02-2072-2091∼2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아시아 지역의 다원화된 종교는 긴장의 원인이자 하나의 기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자는 다른 종교 신자를 ‘적’이 아니라 ‘형제’로 보고 대화해야 합니다.” 1일 서울 명동성당 개막미사로 시작한 아시아가톨릭평신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의장 스타니스와프 리우코 추기경(65·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종교 간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리우코 추기경은 교황청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성직자로 세계 가톨릭 평신도와 관련된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폴란드 출신인 그는 1969년 당시 카롤 보이티와(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대교구장에게서 사제품을 받았고, 200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그는 간담회에 함께 참석한 평의회 요제프 클레멘스 주교의 출신국이 독일이라고 소개하면서 “분단은 이유 여하를 떠나 모든 이에게 큰 불행”이라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톨릭 평신도들은 하느님과의 일치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일치, 즉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개막미사에는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과 리우코 추기경,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 의장 티로나 로날도 주교,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디야 대주교 등 20여 개국에서 온 가톨릭 지도자와 평신도 대표 400여 명이 참석했다. 베네딕토 16세는 파디야 대주교를 통한 교서에서 “아시아에서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평신도들이 증가하는 것은 아시아교회의 미래를 볼 수 있는 희망”이라며 “아시아 개별교회들이 서로 협력해 새로운 활력을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대회는 ‘오늘날 아시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님을 선포하기’를 주제로 7개 발표와 토론, 마테오 리치 신부 전시회 등을 내용으로 5일까지 이어진다. 8일 한국을 떠나는 리우코 추기경은 “이 대회의 준비 과정을 지켜보면서 역동적으로 발전한 한국 교회의 능력을 확인했다”면서 “그리스도인이 소수(3%)에 불과한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지금도 여전히 바다가 두렵긴 마찬가지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무뎌진 것이 사실이다. 항해 경험이 늘어가면서 조금씩 항해술도 배워가지만, 작은 자연의 변화에도 늘 초조해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나는 실감한다. 그러나 항해를 마치고 갖는 희열이 언제나 나를 다시 바다로 향하게 한다. 그렇다! 바다에서는 항상 육지가 그립지만 육지에 있을 때는 또다시 바다가 그립다. 나는 천상 바다 사람인가 보다.”》 9.75m 요트로 일주한 한반도 바다부산에서 태어나 소방관으로 일하던 저자는 다시 사업을 하다 그만둔 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요트를 타기 시작했다. 취미로 접하던 요트는 불혹이 넘어 그에게 새로운 직업을 선물했다. ‘요트 딜리버리’(yacht delivery·외국에 있는 요트를 직접 세일링해 국내 주문자에게 전달하는 일)가 그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위해 요트로 일본과 국내를 오가다 우리 바다의 섬들을 일주하기로 결심한다. 2004년 10월 부산 요트경기장을 출발한 그는 90일간의 우여곡절 끝에 섬 일주를 끝낸다. 이 책은 우리 바다의 다양한 섬에 관한 정보와 여행 중 감상을 담고 있지만 여행안내서라기보다는 항해 일지에 가깝다. 준비 과정에서부터 예측하기 어려운 바다의 변화막측한 얼굴, 요트의 파손과 수리, 섬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사연 등을 담았다. 그의 요트 일주는 동력이 있는 보트나 유람선을 이용한 여행과는 차원이 다르다. 요트는 ‘바람과의 대화’가 항해의 시작이자 끝이다. 때로 바람이 없거나 비상시에 동력을 사용하지만 요트의 기본 동력은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요트 일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여행의 3분의 2는 남해를 거쳐 서해의 백령도 부근까지 올라갔다 다시 홍도, 소흑산도, 제주도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이어 부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동해로 나아가 최북단 항구인 대진항까지 갔다 울릉도를 거쳐 부산의 가족 품에 안겼다. 그의 요트는 32피트(9.75m) ‘마치(march)호’. 원래 조종하려면 4명 이상이 필요한 요트이기 때문에 그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개조하고 겨울철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조타실도 만들었다. 그는 기본적 장비는 물론 안전장비와 공구 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음에도 바다에서는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다고 말한다. 강원 임원항 부근에서는 어선의 그물에 걸려 스크루가 부서져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 이를 교체하기도 했다. 특히 간만의 차가 큰 서해에서는 바닷물이 빠져나갔을 때 요트의 바닥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심이 깊은 곳을 찾아 정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한다면 오늘 잘 곳을 정하지 못한, 망망대해 속 나그네나 다름없다. 저자가 자연과의 버거운 싸움에 지쳤을 때 그를 위로한 것은 아름다운 섬과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요트를 타고 바다로 향하는 그를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요트 항해의 즐거움과 깨달음을 이렇게 말한다. “요트를 타고 바다 위를 항해하다 보면 빠른 배를 타는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많이 느낀다. 바람, 구름, 햇살, 배가 물을 가르는 물살의 느낌, 파도소리…. 이 모든 것을 깊이 느낄 수 있다. 돛배를 타는 즐거움이 어찌 빠르고 좋은 배에 못 미치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아들들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말보다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꾸준히 나아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다 보면 분명 자기가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수경 스님에게는 주지와 불교환경연대, 스님… 이런 ‘틀’들이 자신을 담을 수 없는 ‘작은 종지’처럼 여겨질 수도 있어요.” “승적 반납? 실제 반납한 적도 없고 그건 그냥 뜻으로 읽어야죠.” 6월 화계사 주지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등을 버리고 돌연 떠난 수경 스님에 이어 최근 주지로 임명된 수암 스님(45·사진)을 25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화계사에서 만났다. 수암 스님은 수경 스님의 근황을 묻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스님이 글 말미에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다’고 했는데, 그건 고행과 새로운 원력을 위한 재발심(再發心)이죠. 스님 원력이 이뤄져 화계사 대중이 손과 발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할 겁니다.” 수암 스님은 국제포교와 불교 환경운동의 중심 도량으로 자리 잡은 화계사 주지 자리가 무겁지 않으냐고 묻자 “거목 아래서는 작은 나무가 살 수 없다”며 자신을 낮췄다. 그러면서 이미 30대 초반에 뜻하지 않게 충남 태안 흥주사와 홍성 용봉사 주지를 지냈다고 했다. 선방에서 평생 참구하고 싶었지만 주지 마음을 내라는 큰스님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 것. “불가의 복(福)은 글자는 같지만 뜻은 달라요. 선원에서 수좌로 살며 평생 공부하는 복인데 지금 생에는 그 복이 없더군요. 절집 공사도 감독하고 사람들을 끝없이 만나야 하는 행선(行禪)이 내 복인 듯합니다.” 스님은 수덕사 방장인 설정 스님의 상좌로 1989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고 수덕사 교무국장과 총무원 총무국장, 화계사 총무국장 등을 지냈다. 행자 시절 도반인 주경 스님(부석사 주지)은 수암 스님을 “은사 스님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여도 행자시절의 신심을 품고 사는 ‘늘 젊은 스님’이라고 평했다. “화계사를 솥으로 보면 이를 지탱하는 큰 세 발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숭산 큰 스님이 뜻을 세운 국제포교, 또 하나는 수경 스님의 환경과 생명운동, 그리고 또 하나는 절집 본연의 교육과 기도, 수행입니다. 세 가지 에너지를 모아 넘치도록 끓여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1948년 7월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동아일보는 조각 과정 등을 지켜보면서 이승만의 정치 행태가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전근대적 전제 정치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직시한다. 동아일보 8월 7일자 사설은 결별선언이었다. “대통령은 자기의 우월성을 너무도 과신한 나머지 국회의 세력관계를 아예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정실을 경계하면서 스스로 정실에 흘렀고 당파성을 배척하면서 스스로 당파성을 초월하지 못한 것에 국민은 빈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는 이후 1960년 이승만이 하야(下野)할 때까지 정권의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전시하 민주주의의 촛불 이승만 정권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지만 동아일보는 전시하에서도 국민방위군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 정부의 실정을 파헤치며 ‘야당지’가 됐다. 당국은 동아일보가 1951년 9월 25일자에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부사령관 윤익헌을 구하려고 미 고위층에 거금이 들어갔다는 경찰 조서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편집인 고재욱과 기자 최흥조를 불구속기소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했고 이를 계기로 중앙청, 국회 기자단 등이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에게 언론 관련 악법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전시하 언론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필화(筆禍) 사건이었다. 이후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등 장기 집권을 위한 헌정 파괴가 계속되면서 권력과 언론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동아일보는 1952년 7월 9일 ‘자유와 질서’라는 사설을 통해 계엄하에서 행간의 의미를 전달했다. “지난 4년간의 우리 민주정치의 공과 죄를 따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만약에 죄가 있다면 이는 헌법 그 자체의 결함에서보다는 그나마 이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더욱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한다.”○ 민심을 대변하다 1955년 8월 도의원 선거가 끝난 뒤 호송 경찰관들이 투표함을 뜯고 야당 후보를 찍은 투표지를 여당인 자유당 후보의 투표지로 바꿔치는 ‘환표(換票) 사건’이 발생한다. 투표함 호송에 동행한 박재표 순경은 고민하다 동아일보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보도로 전국은 발칵 뒤집혔고 박 순경은 직무유기죄로 구속됐다. 10개월 옥고를 치른 박 순경은 동아일보 사원으로 특채됐다. 이후 정권의 지시를 받은 면장과 지서장 등이 가가호호 방문해 “야당지 동아일보를 봐서는 안 된다”며 압력을 넣기도 했다. 1958년 1월 23일에는 신문 만화를 허위보도로 몰아 최초로 제재한 고바우 영감 사건이 터졌다. 일반 가정의 변소를 치는 인부들이 대통령 관저의 변소를 치는 인부를 만나자 90도로 절을 하며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라며 인사하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김성환 화백이 즉결심판에 회부되자 1월 31일자 사설 ‘만화를 허위보도라니’를 통해 판결의 부당성을 알리고 비평에 성역이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관리 가운데는 대통령을 마치 군주국가의 원수처럼 신성불가침하고 비판을 절(絶)하는 존재로 착각하는 자들이 적지 아니한데, 민주공화국의 행정부 수반이 여론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4·19혁명의 견인차 1958년 12월 24일 언론 규제 등을 겨냥한 보안법이 개정되자 동아일보는 사설 ‘민주주의의 종언’을 통해 독재정권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단기 4291년 12월 24일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늘을 최후로 종언을 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데굴데굴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획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금권과 폭력이 난무했다. 이에 앞서 동아일보는 3월 11일자 사설에서 부정선거가 권력의 심판대가 될 것임을 경고했다. “우리 국민은, ‘법이 올바로 시행되는 사회라면 형무소에 들어갈 사람들’에 의하여 지배받기를 원치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머지않아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을 확신해 마지않는다.” 동아일보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다. 4월 11일 마산 앞 해변에 당시 17세였던 김주열 군의 처참한 시신이 떠오르면서 경찰의 만행이 드러났다.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4·19혁명의 막이 오르자 이승만은 자유당과의 절연을, 이기붕도 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25일 사설을 통해 일련의 사태가 대통령의 책임이고 3·15 부정선거의 취소와 재선거, 책임자 처벌 등을 촉구하며 독재 정권의 책임을 추궁했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 하늘에 호외가 뿌려지는 동안 동아일보 깃발을 단 취재차량이 지나가면 박수가 나왔고, 군중들이 이기붕의 집에서 찾은 현금 2000만 원을 동아일보에 기탁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로서는 사시(社是)의 하나인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李박사는 실정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기 급급” ▼인촌, 부통령 1년만에 물러나며 사퇴이유서에서 거침없는 비판“…이 박사(이승만 대통령)는 그 자신이 과거 4년간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왔으므로 모든 실정의 책임은 마땅히 그 자신이 져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남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1952년 5월 29일 열린 국회 본회의. 당시 부통령이었던 인촌 김성수의 ‘부통령 사임 이유서’를 비서관 신도성이 대신 낭독했다. 1951년 5월 9일 방만한 정부 운영에 불만을 표시하며 사퇴한 이시영의 뒤를 이어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된 지 약 1년 만의 일이었다. 인촌은 취임 초기 이 대통령의 권유로 국무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때때로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권위주의를 경계해 ‘각하’라는 칭호를 폐기하도록 국무회의에서 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취임 약 40일 뒤인 1951년 6월 26일 이후 인촌은 국정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전 국방장관 신성모를 주일대사에 임명한 대통령의 결정에 실망한 데다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신성모는 1·4후퇴 당시 국민방위군 고급 장교들이 국고와 군수물자를 착복해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한 국민방위군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으로 국방장관에서 물러난 인물이었다. 사퇴이유서는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가득하다. “현 정부의 수반인 이 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혐오하고 아부만 환영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가운데…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 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촌이 이 대통령을 비판한 것은 그의 행동이 한국 민주주의를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인촌은 이 이유서에서 의원내각제에 대한 희망을 밝히며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했다. “나는 평소부터 국무원책임제만이 우리나라의 국정에 적합한 제도라고 믿어왔는데 최근의 사태는 나의 이 확신을 더욱 굳게 하였습니다…나는 우리 국민을 빨리 민주화하기 위하여는 한 사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강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현행 대통령제를 개변(改變)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것을 통감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52년 4월 국회에서는 전체의 3분의 2 이상인 국회의원 123명이 의원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 측 개헌안에 국회의원들이 낸 개헌안의 극히 일부만 덧붙인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통과됐다. 당시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한 채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인촌은 “내가 한 번도 현 정부의 악정에 가담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의 변변치 않은 이름을 이 정부에 연하는 것만으로 그것은 내 성명 삼자를 더럽히는 것이며 민족만대에 작죄를 하는 것”이라며 부통령에서 물러난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4·19 사흘뒤, 희생자 위해 국민성금운동 ▼두달만에 7739만환 답지 1960년 4월 20일 당국은 4·19혁명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가 111명, 부상자는 561명이라고 발표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연일 위문금품을 전달하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고 이에 호응해 동아일보는 4월 22일부터 4·19 희생자들을 위한 위문금품 접수를 하기 시작했다. 위문금품 접수는 일주일 만에 665만4636환(2010년 7월 환산금액 약 6200만 원·쌀 기준), 물품 1만3207점이 답지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위문금품 접수는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제약회사에서는 부상자들의 치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알보민’ 혈청 등을 전달했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노점상인도 내의 10점을 보내왔다. 이 밖에도 계란, 금반지, 오렌지주스, 치약, 칫솔 등 다양한 물품이 접수됐다. 위문금품 액수는 그해 6월 21일까지 7739만4601환(약 7억2100만 원)에 달했다. 당시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다. 동아일보는 4월 24일부터 ‘4월혁명순국학생위령탑’ 건립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즉각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전국에서 272만 환(약 2500만 원)의 성금이 답지했다. 동아일보도 별도로 134만 환(약 1250만 원)을 기부했다. 하지만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4·19혁명 기념사업을 책임지게 됐고 동아일보는 1962년 기탁된 성금 전부를 인계했다. 1963년 9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희생자를 위한 묘지가 건립됐고 묘지 중앙에는 4월학생혁명기념탑이 세워졌다. 동아일보의 4월혁명순국학생위령탑 건립운동에서 출발한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묘지는 4·19혁명 당시 산화한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됐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불교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사진)은 24일인 하안거(夏安居) 해제를 맞아 중국 당나라 때 고승 남양 혜충 국사와 시자인 응진 탐원 스님의 일화를 예로 들어 끊임없는 정진을 당부하는 법어를 19일 내렸다. 스님은 법어를 통해 ‘한 번만 부르고 한 번만 대꾸해도 좋을 것인데 세 번 부르고 세 번 대꾸한 까닭은 무엇이겠느냐’라는 화두를 제시하며 “진리의 문호를 지키고자 한다면 맨발로 칼산지옥을 달려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조계종은 하안거에 전국 104개 선원에서 총 2257명의 스님이 참여했다고 밝혔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