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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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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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두둥둥! 청춘의 함성

    숙명여대 신입생 환영식에서 연주자가 북을 치려고 두 팔을 펼쳤습니다. 그의 어깨 너머로 퍼지는 힘찬 북 울림에 신입생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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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 경호처 차장과 본부장 구속심사 출석[청계천 옆 사진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장 집행을 방해한 혐의 등을 받는 김성훈 경호처 차장과 이광우 경호본부장이 오늘(21일) 오전 구속 심사를 받고 있다. 10시 30분으로 예정된 구속 전 적부 심사에 앞서 두 사람은 일찌감치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에 도착했다. 0950분쯤 먼저 도착한 이광우 본부장이 마스크를 쓴 채 들어갔다.10시 04분에 도착한 김성훈 차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이어가며 약 6분간 법원 정문 근처에 머물렀다.한편 이날 오전 서부지법에서는 경찰이 외부인을 차단했고 기자들의 출입도 제한해 질서를 유지했다.두 사람의 구속 여부는 오늘 오후 결정될 전망이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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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바람 노크… 고궁 문 활짝

    18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을 찾은 관광객들이 창문을 연 전각을 둘러보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23일까지 창덕궁 내 주요 전각의 창호를 여는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평소 내부를 쉽게 볼 수 없었던 궐내각사나 희정당 남행각 등의 실내 공간도 들여다볼 수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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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볍고 탄탄해진 ‘렉서스 디 올뉴 LX700h’

    렉서스코리아가 17일 서울 성동구 앤더슨씨 성수에서 열린 ‘디 올뉴 LX700h’ 출시 행사를 열고 있다. 디 올뉴 LX700h는 플래그십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으로 렉서스 최초로 차체 강성이 강화되고 가벼워진 ‘GA-F 플랫폼’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차량 가격은 트림에 따라 1억6797만∼1억9457만 원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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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새싹을 기다리는 시간

    일회용 종이컵에 흙이 담겼습니다. 올봄 이 작은 세상에서 어떤 모습의 싹이 올라올지 기대됩니다. ―정부서울청사 11층 복도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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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최초 민간 신문 여기자의 근무 모습[청계천 옆 사진관]

    ● 신입 여기자 인터뷰 사진책상 위에 마이크 또는 전화기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습니다(기사 내용상 마이크 보다는 전화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른쪽에는 원고 뭉치가 널려 있습니다. 정갈하게 옷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신문사 여기자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기자 생활을 6개월 정도 한 신입 기자인데 다른 회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해 큰 기사로 소개할 정도로 관심거리였었나 봅니다. 여기자를 부인(婦人)기자라고 불렀고,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기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개채용 시험이 아니고 누군가 추천을 하고, 그 추천을 며칠 동안 고민한 후에 신문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과연 기자생활을 잘 했을까요? 초심대로 훌륭한 기자로 살았을까요? 우선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되 띄워쓰기와 약간의 표현만 요즘 말로 바꿨습니다. ◇ 기자의 생활 - 부인기자 최은희 양기자는 다시 부인 기자(婦人記者)로 계신 최은희(崔恩喜)(23) 양을 방문하였습니다. 언제나 바쁜 직업이기 때문에 전화로 미리 간다는 통지를 하고 지난 9일 오후에 신문사로 양을 찾아가서 바쁜 시간을 한 시간 얻어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양은 지금부터 7년 전 1919년 봄에 시내 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봄은 누구든지 조금도 앞일을 헤아리지 않고 뜨거운 피에 날뛰던 때입니다. 양은 학교의 몇 동지들과 더불어 만세를 부르러 나아갈 때에 창과 칼에 상하는 이를 구호코자 붕대와 고약을 지니고 학교를 나와 종로에 나와선 일어나는 불길에 만세삼창을 부르고 곧이어 잡혀가게 되어 무수한 고초를 받다가 일주일 후에 감옥으로 넘어가서 24일 구류를 받은 후에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온 후 학교에서 주는 졸업장을 억지로 받아 가지고 고향 연백(延白)으로 내려간 양은 다시 그곳에서도 운동을 쉬지 않아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해주(海州)감옥에서 여섯달 동안 예심에서 쓰라리고도 적적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행한 그의 반생, 천하에 외로운 몸이러는 동안에 아버님은 일흔셋이신 높은 춘추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어린 딸을 면회코저 다니시던 중 너무나 심려하신 결과 불행히도 불치의 병으로 병석에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6개월의 철창 생활을 벗어난 양은 2년의 집행유예를 받아 가지고 불이나케 아버님을 뵈러 왔으나 아버님은 다정한 이야기 한마디 하실 사이 없이 혼미한 주에서 양이 출감한지 사흘 만에 사랑하던 자녀를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황천길을 떠나시었습니다. 불행한 운명에 기구한 신세가 되어 버린 양은 집행유예의 몸이 어디로 갈 수도 없어 얼마 지난 후 수원으로 평양으로 안주로 물 위에 뜬 부평초 같이 이곳저곳에서 교편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원 생활이 때때로 취미있는 때도 있었으나 다시 더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동경에 건너가서 여자 대학에서 2년 동안 형설의 공을 쌓다가 여름 방학이 되어 돌아오자 하나이던 남동생이 급성폐렴으로 죽게 되어 그의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픈 인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설상에 가상으로 동경에 지진까지 일어나게 되어 다시 더 공부를 계속지 못하고 고양산천에서 꽃피는 아침 달지는 저녁에 오직 고약한 운명에 부딪치는 자기의 외로운 신세를 늙으신 어머님께 의탁하고 일년 동안을 책보는 것을 소일 삼아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숙려 후에 입사 - 처음으로 사내 기자들 속에그러다가 작년 가을에 어떤 선생의 소개로 신문사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양은 기왕부터 문학에 취미가 있었으며 지금 같은 그러한 생활을 한번 하여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 그 기별을 듣고 일주일 동안 깊이깊이 생각하여 본 후 기자가 되기로 승낙하였습니다. 처음 신문사에 들어갔을 때는 한번도 보지 못하던 이들이 늘어앉아 일하고 한편으로 쉬는 시간에 웃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언제나 혼자로서 또 처음되는 부인기자로서 항상 근신하는 것을 맘에 품고 바쁜 시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여유없는 생활 - 가정 방문과 기사 쓰기에매일 아침이면 일찍이 일어나서 밥도 뜨는 듯 마는 듯 마치고는 동으로 서으로 아는 집 모르는 집으로 장안이 좁다고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추운 날이던지 더운 날이던지 한결 같이 집에 앉아 있는 사이 없이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사회상(社會相)을 대할 때마다 각별한 느낌을 얻게 됩니다. 또 이렇게 분주히 찾아 다닐 때 혹 어떤 곳에는 찾아가면 만날 사람이 없고 혹 어떤 곳에서는 사양하며 보기 좋은 거절을 당하여 그저 돌아설 때에 그 마음 가운데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으로만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또 다른 기사 재료를 구하러 가지 않으면 아니 될 바쁜 몸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녀서 신문사에 정오에 들어가서 단촉한 시간에 기사를 쓰노라면 이마에 땀이 흐르고 마음껏 조급하여 펜을 놀리는 것이 마치 기계 돌아가듯이 바삐바삐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바쁜 기사를 마치고 3시쯤 나오면 또 이곳저곳으로 기사 할 일로 또 쉴 새 없이 바쁘게 다닙니다.◇ 몸은 날로 허약 - 그래도 재미있는 직업이렇게 바쁜 생활이기 때문에 몸에는 큰 영향이 있어 건강에 많은 해를 받게 된답니다. 그 까닭은 제 시간대에 음식을 맞추어 먹지 못하고 이때저때 불규칙하게 먹게 되므로 자연히 몸이 쇠약하여집니다. 밤에는 여자 단체에서 모임이 있으면 집에 들어갔다가도 또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 곳에 참석하여야 됩니다. 그런 여가에는 돌아다니는 몸임으로 옷은 잘 안 입더라도 정하게는 입어야 하겠으므로 집에 들어가면 바느질하기에 손톱만치도 쉴 여가가 없게 됩니다. 양은 현재 당주동(唐珠洞) 136번지에 혼자 객지 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머님은 연백(延白)에서 형님과 함께 계시다는데 한식이 지나면 서울 올라오셔서 양과 함께 살림하실터이랍니다. 기자가 앞으로도 기자생활을 계속하실터입니까 하고 물은 즉 “네. 저도 기왕부터 취미르 가졌던 직업이므로 앞으로 될 수 있는데까지 열심히 이 직업에 종사하려고 합니다”하더이다.● 기자이자 사회 지도자로서의 삶이 기사는 우리나라 민간 신문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선생(1904. 11.21 ~ 1984. 8. 16)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굳이 민간 신문 최초 여기자라고 하는 이유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서 1920년 7월 여기자(부인기자)를 모집했을 때 선발된 이각경 기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1921년 하반기 부터는 이각경 기자의 이름이 신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민간 신문 최초의 여기자는 최은희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서 1985년 펴낸 “신문백년인물사전”에 따르면, ‘최은희 기자는 우리나라 여기자 제 2호로서 1924년 10월 5일 조선일보사 입사 후, 외근도 하면서 재직 8년 동안 남자 기자에 못지 않은 능력을 과시하였다. (기자로 있으면서) 1927년~1930년 근우회 중앙위원 및 재무부장을 겸했다. 1920년대에 비행기 취재를 하는 등 당시 사회 분위기로서는 여자가 하기 힘든 활약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훌륭하게 기자 생활을 한 후 대한부인회 서울시부회장(1948), 한국학회 지도지원(1971),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 등을 역임했습니다. 기자생활은 1931년까지 8년 정도 하셨고 별세하기 전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신문사에 5천만원을 맡겨 ‘한국여기자상(償)’을 제정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매년 한국의 훌륭한 여기자를 뽑아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자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지금은 흔하지만 예전에는 희소했던 직업신문 사진 속 여기자의 모습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은 여기자가 많아졌습니다. 방송 화면에 비치는 정치인들 옆에 여기자들이 마이크와 스마트폰을 들이대며 인터뷰를 요청하는 모습은 지금은 흔합니다. 그러나 제가 1990년대 후반 신문사에 들어올 때 동기 10명 중 단 1명이 여자였습니다. 현장에 나가도 여기자들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선거 즈음 국회 취재를 지원하러 갔을 때 신문과 방송을 통틀어 여기자가 딱 한 명 있어서 그야말로 홍일점으로 눈에 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홍일점은 기업 홍보실 임원을 거쳐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자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 것은 제가 사회 생활을 시작한 지 5, 6년 쯤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였습니다. 요즘 언론사 입사 트렌드는 여기자들이 대세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 여기자들이 일하기 힘들었던 언론사 환경여기자들이 우리나라 언론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습니다. 대학교 서클 여자 선배 얘기를 좀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다니고 있는 신문사에 9년 먼저 입사해서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흔하지 않은 여기자였던 셈인데 가끔 학교에 있는 후배들을 찾아와 술과 밥을 사며 세상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참 멋졌습니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선배는 제가 입사하기 직전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여기자로 살고 싶었지만 신문사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유명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그 선배를 가끔 만나서 1990년대 신문사 문화 이야기를 합니다. 임신부가 있건 상관없이 신문사 실내에서 담배를 피고,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강요했던, 지금 생각하면 ‘야만(?)의 시대’ 였습니다. 물론 그 시절 저 역시 ‘문명인’으로 살았다고 자부할 순 없습니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선후배들과 술자리를 만드는데 적극적이었으니까요. 입사할 때 술을 못 배운 동기가 한명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말에 선배와 동기들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기자를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는 술을 차츰 배워 문화에 적응했고 지금은 시니어 언론인 모임의 총무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된, 6년 차 정도되는 남자 후배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아무도 그가 기자 생활을 하지 못할 거라고 걱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대가 변한 것이죠. 지금은 신문사에서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별로 없습니다. 옛날처럼 마감 후 책상을 붙여 간이 침대를 만들어 놓고, 편집국 사환이 준비해 준 이불 위에서 잠을 자며 밤새 만일에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당직 근무도 지금은 없습니다. 아마 2000년대 여기자가 많아진 것도 이런 환경변화와 서로 연결될 것입니다.그래도 여전히 신문사 기자 생활은 쉽지 않을 겁니다. “몸은 날로 허약 - 그래도 재미있는 직업”이라는 100년 전 표현은 오늘 날 기자들의 탄식과 아주 비슷합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재미있는 직업이라는 투덜거림 같은 것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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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실에선 어떤 옷을 입었을까

    12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의친왕가 복식’ 기획전시를 보고 있다. 의친왕가 복식은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1877∼1955)의 배우자 연안 김씨(1880∼1964)가 의친왕의 다섯째 딸 이해경에게 준 의복이다. 이번 전시는 5월 11일까지 진행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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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뎌진 칼날, 속 시원하게 갈아드립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에 이동식 생활수리 서비스 ‘바퀴 달린 서초 우산·칼’ 트럭이 서 있다. 트럭은 3월 한 달간 서초구 전역을 돌며 구민들에게 우산 수리와 칼갈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4월부터는 사전 신청한 동네와 아파트를 방문할 예정이다. 이용료는 건당 1000원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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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의 대가

    프리저브드 플라워(보존 처리된 생화) 자판기입니다. 이 꽃들은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얻었지만, 기계에 갇힌 채 밖으로 나갈 날만 하염없이 기다립니다.―인천 부평역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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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수의 얼굴을 가려라 - 얼굴을 가린 채 포승줄에 묶인 남성들[청계천 옆 사진관]

    ● 법원으로 들어가는 피고인들의 머리에 씌워진 갓머리에 둥근 통 같은 기구를 쓴 네댓 명의 남성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1925년 3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네이버 옛날신문 보기로 확인하니 같은 날 조선일보에도 사진이 실렸습니다(아래 사진). 남성들 앞에서 찍은 사진이라 좀 더 분명합니다. 용수를 쓰고 있는 사람은 5명 정도 되는데 사진 설명은 3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비슷하지만 재판을 받으러 가는 호송 과정에는 다른 건의 범죄 행위에 연루된 피고인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남성들이 쓰고 있는 기구는 ‘용수’ 입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죄수의 얼굴을 가리는 데 쓰던 갓. 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 죄수의 머리에 씌웠으며, 짚으로 만든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에도 “간수 두 명이 짐승 몰듯 몰고 나온 것은 용수를 쓰고 오랏줄에 엮은 네댓 명의 죄수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합니다. 항일운동 자료를 모아 둔 박물관이나 자료실 등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하지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도구입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망한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도 대나무 재질의 용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사람들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요?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사진이 실린 3월 4일, 다음 날인 3월 5일 그리고 7월에 관련 기사가 있었습니다. ■적기단 사건 공판: 조직과 활동, 그리고 법정 심문지난 3월 4일,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적기단(赤旗團) 사건 공판이 열렸다. 피고는 이정호(31), 홍진의(31), 문재(30) 세 사람으로, 이날 재판은 궁본(宮本) 재판장, 산근(山根), 이집원(伊集院) 배석판사, 그리고 리견(里見) 검사의 주재 아래 진행되었다.이날 법정은 아침부터 많은 방청객이 몰려들어 법정이 가득 찼다.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장은 피고들의 신상 정보를 확인한 후 사실 심문을 진행했다. 먼저 이정호에게 과거 전과 여부를 묻자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한 차례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다”고 답했다.검사는 이정호가 중국 길림(吉林)에서 머무를 당시 적기단의 단장으로 알려진 이승(李承)과 친분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이승이 적기단 간부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단원으로 가입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또 이승이 10년 전 함흥의 부호 고형선(高衡璿)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했으나, 고형선의 신고로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탈옥한 사실이 있는지 추궁했다. 이에 이정호는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막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이정호는 작년 7월 박용하(朴鎔夏)로부터 이승이 고형선에게 협박장을 보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어떤 서면이 보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협박장인지 여부는 몰랐다”고 답했다. 검사는 또 이승이 고형선을 두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고형선의 신고로 이승과 그의 친구가 징역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복수할 계획을 들은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이어 검사는 박용하가 두 사람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정호가 처음에는 10만 원을 요구했다가 점차 금액을 줄여 1만 5천 원을 요구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나는 금전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검사는 그가 실제로 5천 원을 받은 이유를 추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지난해 7월 30일, 박용하를 만났을 때 고형선이 찾아와 먼저 인사를 나눈 후 5천 원을 건넸다. 그는 ‘총 1만 5천 원을 줄 테니 한 번에 지급하면 외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어 3개월에 걸쳐 5천 원씩 지급하겠다’며, 아울러 이승과의 갈등을 원만히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그는 “이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검사는 5천 원을 받을 당시, “1만 5천 원 중 5천 원을 먼저 받았다”는 문구를 적고, ‘적기단 경리 이OO(가명)’이라는 서명을 한 사실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정호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기소된 홍진의와 문재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이날 재판은 일반의 안녕과 질서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부 심문 내용에 대해 방청을 금지한 채 진행되었으며, 오후 1시 10분경 심문이 종료되었다.■적기단 조직과 활동 내용, 그리고 검사의 구형다음 날인 3월 5일, 재판은 계속 진행되었으며, 적기단의 조직, 활동 목적 및 계획 등에 대한 심문은 방청객 없이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오후 6시 30분경 결심이 이루어졌으며, 변호인 측에서는 허헌(許憲), 김찬영(金瓚永), 김용무(金用茂) 세 변호사가 피고들을 변호하며 격렬한 변론을 펼쳤다. 하지만 검사는 이정호에게 징역 7년, 홍진의에게 징역 5년, 문재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재판장 궁본은 최종 판결을 3월 11일에 선고하겠다고 선언한 후 재판을 마무리했다.■예심 종료: 일부 피의자의 면소와 기소 결정7월 28일, 적기단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들에 대한 예심이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경성지방법원에서 장기간 조사를 받아온 신백우 원우관 이봉수 세 사람은 면소 처분을 받았으며, 정재달 이재복 두 사람은 유죄로 결정되어 대정 8년 (1919년) 제령(制令) 제 7조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 동아일보 1925년 3월 4일자, 3월 5일자, 7월 28일자 종합● 당사자인 피고인들에게 ‘얼굴이 가리워진다는 것’의 의미피고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용수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왜 저런 형태의 갓을 씌워 호송했을까요? 서대문 형무소와 뤼순 감옥에 전시된 용수에는 죄인들의 눈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 밖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만,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에선 구멍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짚이나 대나무 재질의 특성상 완전 암흑은 아니고 밖의 빛이 들어오고 또 흐릿하게나마 밖을 볼 수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 호송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죄수들이 이동 중에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숙제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밖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용수입니다.당사자인 피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죄수들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을 다행이라고 생각할까요? 나중에 사회에 복귀할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얼굴을 가리는 것이 나을까요?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좀 줄일 수는 있을까요? 얼굴은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이목구비는 살아 온 삶의 궤적과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용수를 이용해 죄인의 얼굴을 가리면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지워집니다. 중요한 사건의 피고인들이 용수를 쓴 채 공개 장소에 드러나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수치이지 않을까요? 특히 사상범과 정치범의 경우라면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까요?● 공권력 입장에서 용수의 효용성그런 점에서 용수라는 형벌 도구는 공권력의 입장에서는 힘을 과시하는 방법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상이 불손한 피고인들의 얼굴을 대중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하고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용수를 씌워서 호송하는 겁니다. 피고인의 얼굴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결기와 감정을 차단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도 ‘범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죠.그런 점에서 과거에 있었던 용수는 단순한 형벌 도구를 넘어, 공권력이 질서유지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설령 흉악범이라도 사법기관이 함부로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지는 않는 현대 민주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이기도 하구요.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피고인들의 호송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좋은 댓글과 의견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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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의 카메라 활용법…그의 사진은 왜 강한 느낌일까 [청계천 옆 사진관]

    ●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트럼프 사진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사진이 연일 보는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지난 달 28일 백악관으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대한 후 기자들 앞에서 설전을 벌였다. 손가락질을 하고 인상을 쓰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우리가 이전에는 거의 보지 못했던 장면이다. 두 정상의 환담장에는 미국 백악관의 풀(pool) 기자들과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함께 온 취재진이 카메라를 들고 앉거나 서 있었다. 전세계로 생중계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두 정상이 싸우는 모습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크라이나의 언론 플레이도 만만치는 않다. 군복을 연상하게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검정 옷과 군화 스타일의 신발은 외교 관례상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대통령에게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한 우크라이나 외교부가 다음 날 자체 소셜미디어 계정에 ‘이것이 우리의 정장이다’라며 8장의 사진을 올린 것도 ‘비상한’ 대응이었다. 전쟁터의 잿더미 속에서 버티고 있는 우크라이나 소방관, 피가 흥건하게 묻은 가운을 입은 의사, 온 몸을 위장한 군복의 군인들 모습의 사진이었다. 개인적으로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보여주는 모습은 7단계 쯤 되는 마라탕을 먹는 느낌이다. 혀를 마비시킬 정도로 매운 맛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마라탕처럼 사진이, 그것도 외교 무대에서 나온 사진이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강한 사진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점잖아 보이는 유럽 지도자 10명이 모인 이미지를 합쳐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매운 맛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다. ● 트럼프 사진의 특징트럼프의 이미지는 점점 강해지고 독해지고 있다. 동맹이건 뭐건 안중에 없고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정책 변화와 그에 따른 발언 수준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진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 한달여 지난 트럼프 2기의 사진 취재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사진기자를 고를 수 있는 구조로 변화 중 1. 트럼프는 미국 AP통신 등 전통 유력 매체들이 과점하고 있던 백악관 취재 형식에 변화를 강제하고 있다. 선거 기간 동안 총탄을 맞은 채 성조기 아래에서 포효하던 트럼프의 모습을 포착해 트럼프의 영웅 이미지를 강화시켜줬던 AP 사진기자도 최근 백악관 취재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백악관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공동취재(pool) 방식으로 사진 취재가 되도록 유도하고 있는 중이다. ● 밑에서 찍거나 아주 멀리서 찍는 전통2. 전통 유력 매체들의 과점을 변화시킨다고 해서 많은 사진기자들이 트럼프를 취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좁은 공간이라는 특성을 이유로 이전부터 해왔던 것처럼 소수의 사진기자와 영상기자들만이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진기자들은 다른 카메라에 걸리지 않도록 바닥에 앉아 트럼프를 ‘우러러 보는’ 방식으로 촬영한다. 눈높이나 사다리 위에서 아래로 찍는 방식에 비해 주인공의 위세를 강화시키는 앵글이다. 백악관 오피스가 아니라 4일(현지시간) 미국 의회에서 열린 첫 연설의 경우 의원들 뒤쪽 관중석에서 기자들이 대포 같은 초대형 망원렌즈를 사용해 대통령을 바라보게 된다. 배경은 아웃포커스 되고 주인공에만 초점이 맞는 방식이다. 주제가 부각되고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 ● 몸에 밴 연기 실력트럼프 대통령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손 동작이 크다. 얼굴만 찍는 것보다는 손 동작이 있는 인물 사진이 힘이 있는데 트럼프는 한 손도 아니고 두 팔을 움직인다. 쌍거풀과 함께 또렷한 이목구미도 사진에 힘을 보태는 요소이다. TV쇼 경력에 1기 행정부를 이미 경험했던 트럼프가 카메라를 다루는 솜씨는 수준에 올라 있을 수 밖에 없다. ● 얼마나 매운 사진이 앞으로 우리에게 올까자신을 찍는 사진기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자신이 갖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트럼프 대통령의 이미지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 같다. 자신의 지지자를 결속시키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외교 무대에서 다른 나라 정상을 압박하는 사진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이익과 관련된 사진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점점 매워질지도 모르는 원맨 쇼가 앞으로 4년이나 이어진다는 사실과 함께 혹시 그런 사진들이 전세계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의 교범이 되는 건 아닐지 두려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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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모든 일의 시작은 정리

    각종 망치들이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정리돼 있습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작품도 기대할 만하겠는데요. ―서울 중구 신당창작아케이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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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조 배터리는 탑승전 투명 비닐백에

    2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출국장에서 한 여행객이 보조 배터리를 공항에 비치된 투명 비닐백에 담고 있다. 1월 에어부산 여객기 화재 사고 이후 관련 규정이 강화되면서 이달 1일부터 보조 배터리를 기내에 반입하려면 투명 비닐백에 넣거나 단자 부분을 절연 테이프로 막아야 하고 기내에선 몸에 소지하거나 좌석 앞 주머니에 보관해야 한다.인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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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뷰 맛집’

    비둘기 한 마리가 건물 환풍구 제일 위 칸에 자리를 잡고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뷰 맛집’일까요?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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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의 비결… 100년 전 고령자들 이야기 [청계천 옆 사진관]

    오늘(2025년 3월 1일)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1절 의거가 일어난 지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00년 전 신문 기준으로는 6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그날을 기념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1925년 신문을 찾아보니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에서 동포들이 기념식을 했다는 소식이 3월 2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기념 행사를 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미묘하게 의미를 담고 있는 사진이 하나 있었습니다. 같은 날 2면 상단에 실린 종로 거리 풍경 사진입니다. 배경으로 보아 종로2가 탑골공원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사진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눈비 맞은 쓸쓸한 종로거리 - 어제 3월 1일은 마침 첫 공휴일이므로 종로 큰 거리에도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어 음산한 기운이 한량없이 돌았는데 부실부실 내리는 눈송이는 공중에서부터 비가 되어 새 봄을 맞이하는 탑동공원 남산공원 창경원 등의 나뭇가지에는 물에 젖은 눈송이가 힘없이 매달렸더라.비록 3.1절을 직접적으로 기념하지는 못했지만, 상징적인 장소와 설명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100년 전 신문 속 세 명의 고령자 이야기오늘 100년 사진이 고른 사진은 100세 가까운 노인들의 얼굴입니다. 1925년 2월 26일, 27일, 28일자 신문에는 90세를 넘긴 노인 세 명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고령자 생활 상태(1)●12살에 시집가 62살에 과부가 되다-음식을 가리지 않고 외출을 즐기는 96세 할머니, 69세 된 며느리의 이야기서울 수송동 공립보통학교 왼쪽 길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꺾어지는 골목 끝에 위치한 청진동 206번지. 그곳의 대문을 지나 행랑채 단칸방에 사는 김씨 할머니(96세)는 엄성오(61세)의 어머니다.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단칸방이었다. 낡고 누렇게 변색된 신문지가 이곳저곳 붙어 있고, 대나무 발에는 붉은 빈대약이 칠해져 있었다. 방 한쪽에는 검은 때가 묻은 화로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새하얗게 센 머리를 드러낸 김씨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녀는 슬며시 일어나 앉으며 빙긋 웃었지만, 숨이 찬 듯 가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녀가 바로 올해 아흔여섯을 맞은 김씨 할머니였다.●귀가 어두워도 건강한 몸, 서양식 옷을 두려워하다몸이 불편해 보이기에 “누워 계세요”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다시 한 번 빙긋 웃고는 아무 말 없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들 엄성오 씨에게 누우시라고 권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다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서 숨을 거칠게 쉬십니다.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시지만, 몸은 튼튼하십니다.”그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고자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자, 김씨 할머니는 “나는 글을 몰라서 육십갑자를 세지 못하지만, 아흔여섯은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아들 엄성오 씨는 올해 예순하나라고 하며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다시 웃음을 지었다.●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세 아들을 낳다김씨 할머니는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85년 전, 열두 살 때 서울로 시집왔다. 남편은 당시 스물두 살로, 원래 가난한 집안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 와 광화문 주석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은 42년 전, 예순두 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자녀로는 원래 살아 있었다면 올해 일흔여덟이 될 맏아들, 그리고 현재 함께 사는 둘째 아들 엄성오(61세), 그리고 쉰두 살 된 셋째 아들이 있다. 셋째는 현재 하와이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근면하고 성실했던 조상, 69세 며느리의 이야기엄성오 씨의 아내, 올해 예순아홉인 며느리는 자리에 앉을 공간이 부족해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어머니께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나무하러 다니셨지만, 몇 해 전부터 기력이 쇠해 외출을 못 하게 되셨어요. 그래도 나가고 싶어 하셔서 더운 날에는 혼자 자꾸 밖에 나가려 하시죠. 그래서 대문을 꼭 걸어 두고 있어요.드시기야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저희와 함께 식사하시지만, 어린아이처럼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세요. 요즘은 선산에 가는 것도 마다하시는데, 이번 한식에는 꼭 가고 싶다고 하시네요. 밤낮으로 조상 이야기를 하시지만, 워낙 형편이 어려워 차려 드릴 떡 한 조각도 못 사드리고 있어요.“●손자는 상업통신사에 취직 준비 중나는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자, 엄성오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서점과 석탄가게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제 아내도 모두 김해 김씨인데, 김해 김씨라서 가난한가 봅니다.”마침 밖에서 젊은 청년이 들어오자 그는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아이가 우리 아들 운학입니다. 올해 스물한 살인데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동야학을 다녔어요. 앞으로 상업통신사에 다닐 계획입니다.”고령자 생활 상태 (2)●91세의 홍안 노파, 30년간 채식하며 살아온 삶서울 수창동 59번지 내수사 옆에 사는 김성문(66) 씨의 집에는 올해 91세가 된 정송(鄭松)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다. 그녀는 김성문 씨의 장모로, 기자가 찾아갔을 때 딸과 함께 콩나물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머리에는 아직도 검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고, 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어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남편과의 이별, 그리고 다섯 딸과의 생이별정송 노파는 열다섯 살 때, 자신보다 다섯 살 연상인 남편 이원일(李元一)과 수원에서 결혼했다. 이후 다섯 딸을 낳고 가정을 꾸렸으나, 그녀가 서른아홉이 되던 해 남편은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다섯 딸을 모두 시집보냈으나, 임오년(壬午年) 군요(軍擾) 때 각자 피난을 가면서 소식을 잃고 말았다. 이후 딸들의 생사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삼십여 년 전, 갑신년에 서울로 시집간 막내딸과 연락이 닿아 현재까지 함께 지내고 있다.●74세가 되었을 장녀, 그리고 긴 한숨기자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묻자, 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남양 땅 언창에서 살았습니다”라고 또렷이 대답했다. “따님들의 소식을 전혀 모르시나요?”라는 질문에는, 손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맏딸이 살아 있다면 이제 일흔넷이지요. 하지만 어디에서 죽었는지, 삼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자식들의 생사를 모른 채 90세가 넘도록 살아온 그녀의 마음속 깊은 한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30년간 채식하며 살아온 강인한 삶정송 노파의 사위 김성문 씨는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이분은 삼십여 년 전부터 고기를 전혀 드시지 않고 채식만 하십니다. 세월이 흘러 얼굴은 쪼그라들고 살점이 빠졌지만, 몸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아직도 눈과 귀가 밝고 말도 또렷하시죠. 다만 다리에 힘이 빠져 몇 해 전부터는 바깥 출입을 못 하고 계십니다.”●사진 촬영을 앞두고 터진 웃음기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사를 부르겠다고 하자, 딸이 농담 삼아 “어머니도 화장을 좀 하셔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송 노파는 “아이고, 부끄럽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문 앞에서 기자가 그녀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 바라보며 다시 되물었다. “신문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나이가 몇이오?”라고 다시 묻더니 또 한 번 호호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우스운지, 옆에서 놀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도 따라 웃었고, 기자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밖으로 나왔다.고령자 생활 상태 (3)● 95세의 동안 노파, 70세 넘은 자녀와 함께 생활: 건강이 좋아 먹고 싶은 음식은 마음껏,젊어서 고생한 덕에 오히려 건강95세 동안(童顔) 노파70세 넘은 남매, 정성껏 봉양서울 혜화동 57번지, 동소문 안쪽 초가집에는 95세 된 박씨 노파가 살고 있다. 그는 이 집의 가장인 이원식(75세)의 어머니이며, 함께 사는 누나는 70세가 넘은 과부다. 즉, 일흔이 넘은 남매가 100세에 가까운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살고 있는 것이다.장수자의 집을 묻자, 동네 사람들이 술집을 가리켜눈이 소복이 쌓이는 저녁, 기자는 신선한 바깥공기를 마시며 동소문 안 이 집을 찾아갔다. 길에서 만난 몇몇 사람에게 “95세 된 노인이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모두가 한목소리로 “저기 보이는 술집입니다”라며 친절히 알려주었다. 이 노인은 동네 사람들의 자랑거리인 듯했다. 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를 만큼 개인주의적인데, 이곳은 농촌 같은 정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다.●남편은 늙은 총각, 자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박씨는 70여 년 전, 19살 되던 해 임오년에 이씨 집안으로 시집왔다. 남편 이석근은 스물다섯 살의 늙은 총각이었다. 결혼 후 4년 만에 첫아들 이원식을 낳고, 3년 뒤 딸을 얻었다. 그러나 40세가 되던 해 과부가 되었고, 이후로는 아들과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딸과 함께 살았다.●과거 덕수궁에서 일했던 아들, 지금은 약술 장사아들 이원식은 한때 덕수궁에서 일하며 홀어머니를 모셨고, 딸은 들어와 술장사를 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장성한 손자는 구두 장인으로 돈을 잘 벌어 살림이 넉넉했다. 박씨 노파는 젊어서 고생한 덕에 몸이 튼튼했고, 동네를 돌아다닐 만큼 건강했다. 눈과 귀도 좋고, 먹고 싶은 음식은 가리지 않았다. 피곤하면 며칠 동안 방에 누워 쉬기도 했지만, 대체로 건강하게 지냈다.●노년에도 고생스러운 삶, 왼손엔 은가락지기자가 “한번 뵐 수 있을까요?” 묻자, 안에서 대화를 엿듣던 노파가 문을 열고 머리에 조바위를 쓴 채 얼굴을 내밀었다. “이렇게 늙도록 살아서 고생이지요. 호호.” 그는 환하게 웃으며 농담했다. 그 모습은 매우 건강해 보였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은가락지 한 쌍이 반짝였고, 허리춤에는 붉은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100년 전 노인들의 삶, 그리고 우리의 미래1925년 당시 조선에서 100세 이상 인구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시 평균수명은 40대 중반에 불과했고, 의료 기술과 생활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100세 이상 인구는 극히 드물었을 것입니다.1925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부 90세 이상의 고령자 10명’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8명, 일본인 2명이 있었고 최고령자는 98세의 조선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노령 인구는 급격히 늘고 있고 100세를 넘는 고령층도 두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2024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00세 이상 인구는 2019년 4,874명에서 2023년 7,634명으로 56.63% 증가했습니다. 특히 여성 노인이 남성보다 4.8배 많습니다.100년 전 김씨, 정씨, 박씨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노인들이 겪었던 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도 경제적 어려움과 신체적 쇠약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아갔다. 사랑하는 이를 전란으로 잃거나 먼 곳에 떠나보내고도 다시 만나지 못하는 비극도 흔했습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들의 적응력과 회복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외출을 즐기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정송 노파는 30년간 채식을 하며 건강을 유지했습니다. 박씨 할머니는 젊어서 했던 육체 노동이 오히려 건강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건강을 유지할 계획이신가요?오늘은 100년 전 어려운 상황에서도 100세에 가까운 나이까지 생존했던 할머니 세 분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느껴지셨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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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식 언론 개혁, 피격 순간을 촬영한 사진기자는 어떻게 될까[청계천 옆 사진관]

    ● 미국 트럼프의 언론 개혁(?) 시작필자는 한국의 사진기자이다. 최근 미국 백악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진 취재 방식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들의 취재 방식을 바꾸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 분쟁을 정리하는 방식과 우방국을 포함한 외국 제품의 수입 관세 분야에 이어 미국 내 취재 시스템에 대해서도 트럼프식(式)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25일(현지 시간) 브리핑에서 “수십년간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백악관 출입기자단이 백악관 집무실 등의 공간에서 질문할 수 있는 풀(pool) 기자로 누가 참여할지를 결정했으나 더는 아니다”라면서 “일부 언론이 백악관 출입 특권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 취재 규범(norm)의 변화는 미국의 독자들이 걱정할 이슈인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의 사진기자로 바라보는 미국 트럼프 백악관의 변화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태평양 너머 미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미국 백악관 취재 시스템이 한국 대통령실 취재 시스템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백악관 취재를 담당하는 취재기자의 경우, 어쩌면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질문을 할 수 있는 우선권을 갖지 않더라도 대통령 또는 대변인의 말을 잘 기록해 사후에 분석해 맥락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는 다르다. 접근이 되지 않는다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 풀 (Pool) 취재의 방식백악관 대변인이 언급한 풀 기자는 한국에서도 사용하는 용어다. 풀은 카 풀(car pool)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풀 취재는 차를 함께 타듯이 취재를 함께 한다는 의미이고 풀 기자는 해당 취재를 담당하는 대표 기자를 말한다. 보통 기자단이 꾸려지면 가나다 순 또는 별도의 풀 순서에 따라 풀 취재 당번이 결정된다. 한국의 경우 현재 대통령실 출입사진기자단에 9개의 매체가 소속되어 있다. 근무와 출장 여력이 있는 회사들이 포함되어 있고 1983년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시스템이다. 백악관출입사진기자단을 본 딴 조직이다. 미국 백악관 출입사진기자단 (WHNPA·White House News Photographers Association)은 1921년 6월 13일 정식 출범했다. 2024년 말 기준 미국 백악관 사진기자협회에는 약 250명의 회원이 있다. 이들이 모두 백악관으로 출근하는 것은 아니며 하루 평균 10명의 사진기자들이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취재하고 있으며, 프레스 룸 옆에 사진기자들이 대기하는 사진기자실 공간이 따로 있다. 2016년 대통령 취재를 위해 방문했을 때 이곳 기자실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약 6개 책상이 있었다. AP통신과 뉴욕타임즈 등 유력 매체의 기자들만이 상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미국 백악관 대변인의 브리핑 장면 바로 앞부분에 기자들 의자가 있고 그 뒤쪽으로 사진기자실이 있었다. 백악관을 출입했던 사진기자 경력 35년의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는 필자에게 이메일로 다음 내용을 알려주었다. 외국 지도자가 방문하는 등 백악관에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최대 25-30명의 스틸 사진기자들이 동시에 모인다. 백악관을 정기적으로 취재하고 백악관 “하드 패스(hard pass)”를 소지한 스틸 사진기자의 총 인원 수는 약 50명 정도인데 하드 패스를 소지하면 언제든지 백악관 경내와 프레스룸에 출입할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을 취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은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Oval Office)에서 진행되는 이벤트와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는 “타이트 풀(tight pool)”로만 취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트 풀의 가장 작은 형태는 대통령과 함께 에어포스 원(Air Force One)을 타고 국내 및 해외여행을 함께하는 12명의 취재진으로 구성된다. 이 풀은 3명의 통신사 취재 기자, 1명의 신문 풀 취재 기자, 3명의 TV 네트워크 팀(카메라맨 포함), 1명의 라디오 기자, 그리고 4명의 스틸 사진기자(AP, 로이터, AFP, 뉴욕타임스에서 각 1명)로 구성된다. 스틸 사진기자의 경우 이 4개의 조직 외에는 다른 스틸 사진기자가 대통령과 함께 에어포스 원을 타고 여행하지 않는다. 이들 4개 조직은 자신들의 클라이언트와 구독자 외에는 이미지 공유를 하지 않는다. 이는 TV 네트워크가 한 명의 카메라맨이 모든 네트워크와 공유하는 것과는 다르다. 백악관 내부 행사를 취재하는 풀에도 동일한 4명의 스틸 사진기자가 항상 있지만, 게티(Getty)와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도 사진기자가 추가로 포함될 수 있다. 또한, ISP(Independent Stills Pool)라는 작은 조직의 그룹도 매일 한 명의 사진기자를 풀에 포함시켜 다른 ISP 조직과 이미지를 공유한다. ● 총탄 맞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촬영한 AP 사진기자는 어떻게 될까?2024년 7월 미국 대선을 4개월 앞두고 미국 공화당 후보였던 트럼프가 피격 당하는 현장에서 성조기를 배경으로 피를 흘리며 손을 들어 보이는 트럼프 사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기자가 있다. AP통신의 에반 부치(Evan Vucci)기자다. 20년 이상 미국 백악관 등 정치 현장과 스포츠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 사진기자이다. 총성이 들리자 마자 몸을 숨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트럼프 후보쪽으로 달려가 특종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트럼프는 이 사진으로 지지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더 강화할 수 있었고 선거 유세 기간 동안 상징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트럼프 지지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사건 직후 이 사진을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올려 공유했었다. 에반 부치는 현재 미국 백악관 출입 AP 사진기자인데 최근 벌어지는 백악관과 AP 통신 사이의 갈등 속에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가 소속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사로 송출되어 들어오는 AP 사진 속에 에반 부치의 이름은 계속 나오지만 트럼프를 직접 찍은 사진은 최근 사라졌다. 기자실에서 대변인의 모습 정도만 사진으로 찍어 보도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제한 조치를 받았는지는 확인 중이지만 변화는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 언론과 권력의 갈등미국 AP 통신과 백악관의 갈등이 첨예화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멕시코만’의 이름을 ‘미국만’으로 바꾸었지만 AP 통신이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혀서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알래스카주의 북미 최고봉인 데날리산을 매킨리산으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AP통신은 자체 스타일북 표기법에 따라 원래 지명인 ‘멕시코만’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2025년 2월 11일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 공무원 대폭 감축 지시를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행사를 취재하려던 AP기자가 행사 출입이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AP 통신이 기사화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취재 기자는 출입이 거부되었지만 AP 사진기자는 백악관 행사에 출입을 허용받았다는 기사도 있지만 최근 트럼프 특종 기자의 사진이 브리핑룸 스케치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앞으로 미국 트럼프 사진의 취재 방식은 어떤 변화를 겪을까사진은 카메라 앞에 있는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촬영해서 독자에게 보여준다는 일종의 신화를 갖고 있다. 보도사진이 존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사진은 100% 객관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무대를 세팅하는 참모들과 피사체인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카메라를 인식하고 사전에 준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최종 선택 과정에서 편견과 입장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훈련되고 독립된 사진기자가 촬영하는 사진은 한계가 덜한 편이다. 대통령이 인사권을 갖고 있는 전속 카메라맨이 촬영한 사진과 언론사에서 월급을 받는 사진기자가 촬영한 사진은 아주 미묘하더라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자신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카메라만 옆에 있기를 원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트럼프를 최소한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확실하게 만들어 준 피격 순간 사진을 찍었던 AP의 사진기자는 앞으로도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미국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바로미터가 될 것 같다. ● 당사자의 입장 표명이 글을 쓰면서 한국시각 27일 오전 에반 부치 기자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DM을 보냈다. 한국 언론에 나온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풀 취재 계획에 관한 보도를 보여주면서 “혹시 AP 통신 백악관 출입 사진기자로서의 당신의 역할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아마 전세계 많은 포토저널리스트들과 기자들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에반 부치 기자는 개별 답변 대신 인스타그램에 한국 시간 28일 오전 다음과 같은 포스팅을 올렸다. “메시지를 보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트럼프)행정부는 내가 백악관 사진취재하는 것을 금지 시켰다. 이유는 AP 기사 표기 스타일을 둘러싼 분쟁 때문이다. 희망하건데 빨리 이 사태가 끝나서 역사를 기록하는 내 역할로 돌아가고 싶다.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는 짧은 입장문이다. 현재 미국 백악관 사진은 AP망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곤 있다. 그러나 사진의 촬영자 정보에는 기자 개인의 이름이 빠져있다. 풀 취재를 통한 사진이라는 표시만 있다. 미국 언론의 취재 범위에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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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 졸업식, 이젠 플래카드 보는 재미! [청계천 옆 사진관]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린 2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각 단과대학별로 강당이나 강의실에서 조촐한 졸업식이 진행되었죠. 다만 코로나19 이후 자리 잡은 변화인지, 대학 졸업이 끝이 아니라는 공감대 때문인지 예전처럼 친척들이 대규모로 몰려와 함께 축하하는 풍경은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습니다. 가끔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와 함께 참석하는 졸업생들이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모습이었습니다.백양로를 따라 걷다 보면 졸업생과 후배들이 설치한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는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들은 졸업하는 선배들의 이름과 얼굴을 정성껏 넣어 플래카드를 제작하고, 졸업식 당일에도 부지런히 새로운 현수막을 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졸업생들 또한 스스로를 표현하는 문구를 준비해 학교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이러한 플래카드 속에는 요즘 대학생들의 관심사와 문화가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넷플릭스, 웹툰, 유튜브가 주요한 문화 코드가 된 시대를 반영해, 인기 드라마나 웹툰 대사에서 착안한 졸업 축하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또한, 청춘들의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빛나는 유머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 걸까?”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이제 겨우 시작이다!”라는 기대가 공존하는 순간. 그 속에서 2025년 2월 졸업생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24일 서울 연세대 졸업식장 주변 플래카드를 몇 장의 사진으로 소개드립니다. 그리고 사진 속 졸업생들의 멋진 청춘을 응원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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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 눈]봄을 부르는 한 방울

    지붕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햇볕에 한 방울씩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막바지 강추위도 뚫고 곧 봄이 올 것이라는 듯. ―인천 부평구 부평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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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 웅변대회는 왜 사라졌을까? [청계천 옆 사진관]

    ● 청중 앞에서 연설하는 남자지난 100년간 우리나라 신문에 실린 이미지의 변천과 의미를 찾아가는 ‘백년사진’ 코너입니다. 오늘 소개할 사진은 1925년 2월 1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입니다.검은 외투를 입고 짧은 머리를 한 청년이 연단에 올라 아래를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단 아래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연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웅변대회가 열렸던 순간입니다.● 웅변대회의 소멸동아일보 DB에서 ‘웅변’이라는 키워드로 사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60년대 이후 디지털화된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서 단 113장만 검색되었습니다. 그중 한국인이 등장하는 사진은 극히 적었습니다.의외입니다. 1970, 80년대 학교를 다니셨던 독자라면 반공 웅변대회, 불조심 웅변대회 등 다양한 웅변대회를 기억하실 텐데 말이죠. 그런데 남아 있는 사진의 절반 이상이 북한 사람들이 웅변하는 모습이고, 나머지는 주한 미군의 웅변대회 사진이었습니다. 정작 한국의 초·중·고교에서 열리던 웅변대회는 사진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이는 웅변대회가 뉴스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웅변대회 자체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2000년대 이후 초·중·고생이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끔 영어 웅변대회 홍보물을 본 기억은 있지만, 과거처럼 전국적인 대회로 주목받는 일은 드뭅니다.엄혹한 시대에는 ‘스피커’를 응원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큰 목소리로 군중을 설득하는 것보다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쌓는 것이 개인과 사회 전체에 더 유익하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는 듯합니다. 정치는 분야별 전문가인 대표자들에게 맡기고 말입니다.●아직도 큰 목소리가 필요한 시대일까그런데 2024년 12월 이후, 우리는 너무 많은 ‘웅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윤석열 대통령이 쏘아 올린 계엄이라는 화살이 국회 탄핵 결의와 헌법재판소 변론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법조인들의 화법과 논리를 영상으로 직접 접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는 좌우 진영을 겨냥한 중계방송과 해설방송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와 집회 현장에서는 차마 옮기기 힘든 욕설이 들립니다높은 톤의 목소리, 주장 전달을 위한 단어 선택, 강조를 위한 반복. 초등학교 시절 접했던 웅변대회의 형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입니다. 말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통해 큰돈을 벌었고, 어떤 이는 돈을 포기하고 뜻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이제 와서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그런데 걱정이 듭니다. 사람은 시대를 닮아간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양극단으로 나뉜 목소리 속에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전쟁터 같은 언어를 듣고 자란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지난 두 달 동안 쏟아진 수만 개의 영상 속에서, 저는 2025년 2월 19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 심판 1차 변론기일에 출석한 한덕수 국무총리의 ‘웅변’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는 톤을 높이지 않았고,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치가 타협과 희생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뒤로 빠지면서 우리 내부의 갈등이 광장과 연단으로 넘어간 2025년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는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저만 그런가요?오늘은 100년 전 조선의 발전을 염원하며 열렸던 웅변대회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혹시 당시 웅변대회 기사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아래에 기사를 첨부합니다.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 웅변대회 - 2천여 명의 청중이 운집, 연사의 열변과 장내의 긴장평양청년회 주최, 조선일보 및 본사(동아일보) 평양지국 후원으로 제1회 전조선 청년·학생 현상 웅변대회의 첫날 일정이 예정대로 13일 밤 평양 설암리 천도교당에서 개최되었다.평양에서 처음 열린 대회였던 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초저녁부터 군중이 몰려들어 약 2천여 명이 운집하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오후 7시 30분경, 평양청년회장 정두현 씨의 개회사로 웅변대회의 막이 올랐다.첫 연사로 용강 기독청년 대표 이두록 군이 ‘나는 맹수 같은 청년이 되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우리 청년들은 비굴한 존재가 되지 말고, 천병만마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자 같은 청년이 되자”는 요지의 열변을 토했다.이어 광성고보 기독청년 대표 김대성 군이 ‘우리의 환경’이라는 주제로 연단에 올랐다. 그는 “모든 것은 환경에 지배된다. 지금 우리의 환경을 보라. 안으로 들어와서는 살 수 없고, 밖으로 나가서도 활동할 여지가 없다”고 하며, 조선의 역경과 영토 문제를 언급했다. 특히 “조상이 물려준 국토를 팔아먹지 말자”라고 강조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다음으로 평양 불교청년회 대표 김광수 군이 ‘살길을 찾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한다. 배부른 세상을 원하느냐, 배고픈 세상을 원하느냐?”라고 질문하며, 국토를 팔아먹고 혹독한 북풍한설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현실을 꼬집었다. 또한 재해민 문제를 거론하며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 후, 민족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금전, 지식, 단결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금주·금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잠시 독창 공연이 있은 후, 숭대 기독청년회 장애경은 ‘우리 사회의 활로’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나는 평등주의 사회조직을 원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길 바란다. 도리가 없는 사회는 멸망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수많은 빈민의 참상을 이야기한 후, 천도교 신도의 준동(蠢動)을 비판하고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이어 광성고보 학우회 대표 곽주홍 군이 ‘역경에 분투하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건강한 몸과 정신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 노력해 진보와 발전을 이루자”고 주장했지만, 일부 청중들의 야유와 냉소적인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신의주 제2교회 청년회 대표 이예용 군은 ‘오직 참이 있어야 한다’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우리는 오직 진실을 추구하고 허위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개혁가 러셀의 말을 인용하며 기독교적 이상을 설파했다.다음으로 평양 동명학우회 대표 이덕산 군이 연단에 올라 ‘새봄을 맞이한 우리’라는 주제로 현 사회 조직의 불합리성과 계급투쟁을 논했으나, 논리적인 요지를 잡기 어려웠고 조롱과 야유가 끊이지 않았다.이어 평양 유정 엡웟청년회 대표 박기석 군이 ‘조선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조선의 모든 현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청년의 사명이 막중하다. 무산 계층의 비참한 현실을 보다 나은 환경으로 이끄는 것이 청년의 임무이다. 형제들이여, 미래를 낙관하자”고 주장하며 생활문화 향상에 대해 역설했다.잠시 음악 연주가 있은 후, 성천청년회 김병욱 군이 ‘사람의 근본 문제’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사람이란 원칙적으로 평등하다. 그런데 오늘 밤 연설자들은 ‘내 민족, 내 민족’이라고만 외치고 있다. 그러면 세계 16억 인구 중 조선 민족만 잘살겠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주장했다. 또한 “사람의 근본 문제는 교육에 있다”라고 결론지었다.다음으로 평양 경창문외 예수교 청년회 대표 이홍현 군이 ‘우리의 활로 실천’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국제연맹이 우리 민족을 구해줄 것인가? 아니면 코쟁이 백인들이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라고 묻고,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유일한 희망은 실천뿐이라며 실천주의를 역설했다.이어 평양 연화동 청년회 대표 오희수 군이 ‘우리 사회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우리의 급선무는 경제, 교육, 사상보다도 단결이다. 우리 2천만 민족이 단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인의 단결력 부족을 개탄하며 연설을 마쳤다.마지막으로 보성전문 학생친목회 대표 주병서 군이 ‘조선의 현상과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청년은 사회의 모든 현실을 파괴할 수도, 건설할 수도 있다. 러시아 제국도 청년들에게 주의 사상이 스며들자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혁명을 예로 들어 조선 청년의 사명을 열변했다.이처럼 뜨거운 열기 속에서 첫날의 웅변대회가 마무리되었다.1925년 2월 16일 동아일보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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