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녹아든 건축물… 고국서 꽃피운 이타미 준의 예술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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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포도호텔’ 건축가 故유동룡, ‘이타미 준’ 필명 탓 일본인 오해도
한국 이름으로 학교 다녀 차별 시달려… 괴롭힘 심해 복서 마음으로 버텨
2005년 佛훈장 수상때 “난 한국인”… 딸인 유이화 이타미준재단 소장
“제주서 어린이건축학교 등 추진”

이타미 준이 제주 민가를 모티프로 만든 포도호텔(오른쪽 사진)과 제주 자연을 담은 수풍석박물관(왼쪽 사진). 그의 딸인 건축가 유이화 씨를 이타미 준 회화전 ‘심해’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웅갤러리에서 만났다. 사진가 김용관 씨 제공·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1937∼2011·사진)의 대표작인 제주 ‘포도호텔’은 게스트하우스 26채가 수평으로 연결된 낮은 건축이다. 수익을 추구했다면 고층 건물을 올렸겠지만, 나지막한 오름이 굽이치는 제주의 지형에 맞춰 겸허히 자리한다. 제주 민가가 자연 발생하듯, 이곳의 객실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 모습을 위에서 보면 알알이 맺힌 포도송이 같다.

주변의 자연환경을 양분으로 탄생하는 건축, 대지를 이기려 들지 않고 그곳에 살포시 안기는 건축을 이타미 준은 추구했다. 수풍석박물관(제주), 방주교회(〃), 구정아트센터(충남 아산시) 등 국내 곳곳에 아름다운 건축을 남겼지만, 여전히 ‘일본인 건축가’로 잘못 소개되기도 한다. 그런 그를 기억하기 위해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을 설립한 딸 유이화 ITM건축연구소장(45)을 2일 만났다. 이타미 준의 회화를 선보이는 ‘심해’전이 서울 종로구 웅갤러리에서 7일 개막해 9월 7일까지 열린다.

유 소장은 아버지에 대해 ”한국인으로 치열한 건축가의 삶을 살았다”고 했다. 이타미 준은 2005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수상했을 때도 “나를 외부인으로 보던 일본 건축계가 충격을 받았다. 날 뭐라 부르든 나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평생 귀화하지 않고 한국 여권을 들고 다닌 그는 대학 졸업 후 출판물에 기고를 하려다 이름 ‘유동룡’ 중 유(庾)의 활자가 없어 ‘이타미 준’이라는 필명을 짓고 활동했다.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한국 이름으로 학교를 다녀 차별도 많이 받았다. 유 소장은 “아버지가 학창 시절에 이지메(집단따돌림)를 당해 ‘복서의 마음’으로 살았다”고 했다. 이런 태도가 항상 치열하게 사는 자세를 만들었다.

“외국인 관리 차원에서 5년마다 하는 손가락 지문도 찍었죠. 범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불쾌한 일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오기가 생겨 훌륭한 건축가가 되기로 다짐했다고 해요.”

각종 불이익에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은 건, “어렵게 살아도 한국인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고 강조했던 부모의 교육 때문이었다. 장남인 그에게 부모는 “너는 유금필 장군의 후손이고 무송 유씨의 43대손이니 집에 불이 나도 족보는 챙겨라”고 늘 당부했다.

그런 그의 건축은 이우환으로 잘 알려진 ‘모노파’를 공간에서 구현한다.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과 주변의 맥락, 재료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살리기 때문이다. 이는 재일 한국인 화가 곽인식(1919∼1988)을 스승처럼 따르며 받은 영향이다.

지난해 재단을 설립한 것은 그의 유언에서 시작했다. 그는 생전 입버릇처럼 “내가 죽으면 두 번째 서랍의 유언을 봐라”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떠나고, 가족들이 긴장한 마음으로 펼친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타미 건축문화재단과 건축상, 건축기념관을 만들어라. 여기에 필요한 자금은 내 그림을 팔아서 써라. 이 모든 책임은 내 딸 유이화에게 있다.’

5초간 정적이 흐른 뒤 온 가족이 웃으며 유 소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통역사 역할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그가 맡아주길 바라던 마음이 담긴 유언이었다.

유 소장은 “제주 지역을 기반으로 어린이 건축학교나,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해 후배 양성과 건축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디지털이 범람하는 시대에 ‘손’의 힘도 일깨우고 싶다고 덧붙였다.

“손의 감각과 신체에서 나오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싶어요. 어떤 형태이든 이타미 준을 우상화하진 않을 겁니다. 그 정신만 전해지면 충분하죠. 아버지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건축가 이타미 준#제주 포도호텔#이타미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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