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대학과 중소기업, 스타트업과 손잡고 세계 최초로 만들어 낸 ‘자동차 독립 음장(音場·소리의 공간) 시스템’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현대차는 지난달 12일 이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같은 실내 공간에서 각각 다른 소리를 듣는다는 말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5일 경기 화성시 현대·기아자동차남양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 내 NVH랩에 있는 무향실에 들어서자 현대차 플래그십 세단 EQ900이 보였다. 무향실은 외부의 모든 소음을 차단한 공간이다. 차 트렁크에서 빠져나온 긴 전선과 노트북 2대도 보였다. 차 실내 공간은 일반 차와 다름이 없었다. 연구원의 안내에 따라 차 뒷좌석과 앞좌석에 번갈아 앉아봤다. 뒤에서는 카르멘이, 앞에서는 모나리자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뒤에서는 카르멘만, 앞에서는 모나리자만 들렸다.
2014년 현대차가 기획에 착수했을 때 국내 독립음장의 원천기술은 최정우 KAIST 전기전자공학부 부교수(42)가 보유하고 있었다. 최 교수는 가정집, 사무실에서 독립음장 기술을 구현하는 연구를 하던 중이었다. 자동차는 그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현대차와 최 교수는 뜻을 모았다.
개발 실무를 맡은 홍진석 현대차 연구개발본부 소음진동개발3팀 책임연구원(49)이 2014년 2월 단신으로 대전 KAIST에 내려갔다. EQ900의 구형 모델 에쿠스 한 대도 가져갔다. 마땅한 연구공간은 없었다. 캠퍼스 야외에, 지하주차장에,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진땀을 흘렸다. 그해 12월, 독립음장 기술을 자동차에 구현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 현대차 “독립음장 기술 수년내 고급차에 적용” ▼
현대차와 KAIST는 독립음장을 구현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SW)를 만들었지만 실행시킬 하드웨어(HW)가 없었다. 현대차의 많은 계열사에서도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소문 끝에 중소기업 위아컴의 박상온 대표(57)를 알게 됐다. 박 대표는 예전에 LG전자에서 CD, DVD 개발을 담당하며 데이터 부문에 잔뼈가 굵은 전문가였다. 현대차의 구상을 들은 박 대표는 “가능할 것 같다”며 2015년 8월 HW 개발에 착수해 이듬해 3월 초기형 디지털시그널프로세서(DSP)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4월 업그레이드 버전도 만들었다.
당시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였던 유용길 번영 대표(30)도 가세했다. 그는 현대차의 SW를 박 대표가 만든 DSP에 이식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이 일이 점점 발전해 올해 2월 세운 스타트업이 번영이다.
이처럼 대기업과 대학, 중소기업, 그리고 스타트업의 ‘외인구단’이 뭉쳐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유 대표는 “현대차라는 대기업이 만든 판에서 중소기업, 스타트업이 어떻게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번 사례가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독립 음장기술의 개발은 거의 완료된 상태지만 아직은 좀 더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장비를 좀 더 작게 개선하고 앞으로 어떻게 더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수년 내에 고급 플래그십 차종부터 독립음장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뒷좌석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통화를 해도 운전자는 이를 알아들을 수 없도록 ‘방해음파’를 쏘는 기술도 곧 개발을 끝낼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차량 뒷좌석을 ‘카 시어터(자동차 영화관)’로 만들 수도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관련 특허 출원이 이미 한국 미국 등에서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화성=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화성=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