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백범이 김일성에게 당했다”는 태영호가 맞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0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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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또 구설수에 휘말렸다. 이번엔 백범 김구에 관해서다. 야당은 물론이고 사방에서 “백범을 폄훼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같은 당 의원들도 국민 상식과 괴리된 망언이라고 쌍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 뉴스1
그러나 구소련 붕괴 뒤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그 상식과 다르다면 어쩔 것인가. 태영호는 좌파세력이 은밀하게, 음흉하게 진행해온 ‘역사전쟁’을 지적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면서 백범엔 말도 못하는 현실은 온당한가. 그런데도 웰빙당 국힘은 그저 공격당하는 게 무서워 지킬 걸 못 지키고 있다면?

● 바쁜 독자를 위해 요약하면…
노파심에 백범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하고 시작하겠다. 글이 길면 냅다 맨 끝으로 내려갈 독자를 위해 3개항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태영호는 KBS ‘역사저널 그날’을 언급하며 “김일성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것”이라고 월간조선 5월호 인터뷰에서 말했다.

② 1월 22일 방영된 ‘한국사 최대 라이벌 김구 vs 이승만’에서 방송 진행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백범과 달리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운 인물’처럼 표현했다.

③ 1990년대 발굴된 소련 정보장교 레베데프 비망록 등에 따르면, 백범이 참석한 1948년 4월 평양 남북연석회의는 소련의 배후 조정 아래 마련된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이었다.

1948년 4월 22일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백범 김구 선생. 동아일보DB

● “KBS 역사물 보고 놀랐다”
태영호는 뜬금없이 백범을 말한 게 아니다. 월간지 인터뷰에서 질문자가 “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된다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더라”고 운을 떼자 그는 답했다.

“지난 구정 때 KBS의 ‘역사저널 그날’이란 프로그램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구 선생은 마지막까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됐다는 식으로 역사를 다루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북한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걸 봤을 때는 김구 선생이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겠지만, 북한의 대남 전략 전술을 아는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는 김구 선생이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한 겁니다. 김일성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해 김구 선생을 이용한 겁니다. 그런 북한의 전략까지 알려줘야 정확한 비교가 되지 않습니까.” (맥락을 봐주세요. 어디가 잘못된 대목인지)
● 좌우합작은 공산당 통일전선전술
그 프로그램을 TV클립으로 보았다. 우리 역사를, 역사적 인물을 이렇게 다뤄도 되나 싶을 만큼 얄팍하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백범의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소개하면서 진행자들은 굳이 “투(To) 이승만”을 덧붙이며 웃었다. 젊은 그들이 이승만을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운 인물’처럼 취급하며 찧고 까부는 모습이 나는 불편했다.

1930~4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좌경화 바람이 불 때, 누구보다 앞서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나치즘 파시즘처럼 전체주의 속성을 지닌 공산당은 다른 정당과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좌우합작, 즉 통일전선전술이란 한반도를 공산화로 이끌 함정이라고 이승만은 판단했다.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동아일보DB
중국 국공합작이 보여주듯, 통일전선전술은 세계 공산혁명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술로 꼽힌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때 팔로군 간부를 모아놓고 “10%만 대일작전에 쓰고 70%는 공산당 발전에, 20%는 국민당과의 타협에 쓰라”며 절대 애국주의에 현혹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런 기만술을 어떤 당이 당해낼 수 있겠나.

● “김구가 김일성 흠모해 찾아왔다” 선전
‘역사저널 그날’엔 백범이 1948년 4월 22일 평양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연설 장면도 나온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 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훌륭한 연설이지만 백범은 빈손 귀경할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 붕괴 뒤 발굴된 소련 정보장교 레베데프(평양 25군 군사회의 의원) 비망록에 따르면, 이 회의는 소련이 배후 조정한 것이었다. 백범이 회의를 방해하면 ‘미제 간첩’으로 몰아세운다는 계획도 서 있었다. 스탈린은 1948년 4월 12일 ‘김일성 동지를 위한 조언’ 지령문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를 보이콧하게 만들라고 적시했다.

당시 김구, 김규식 측근들로 성시백(1950년 6월 27일 간첩죄로 처형)이 포섭한 김일성의 첩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북한은 김일성 집권 내내 김구가 김일성을 흠모해 북한을 찾아왔다고 김구의 방북을 이용했다(정주진 2018년 논문 ‘소련 군정기 북한정보 체계 형성 과정’). 태영호가 “김구 선생이 김일성의 통일전선 전략에 당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터다. 그래도 그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 김일성에 속았다고 폄훼인가?
물론 국가보훈처는 백범에 대해 “임시정부 시절 좌우합작을 일구어냈고, 환국한 뒤에는 통일국가 수립운동에 몸을 던졌다”고 소개한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태영호가 말한 대목을 다시 보시라. 그가 백범의 공로를 부정했는가?

김일성의 평양 연석회의 초청장을 들고 김구에게 온 성시백은 김일성이 심어놓은 북로당 공작원이었다. 물론 좌파는 조작된 간첩이라고 주장하지만(지금 세상에 없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대표적이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노동신문은 ‘민족의 령수(김일성)을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 혁명렬사’라는 제목으로 희대의 간첩 성시백을 찬양했다.

남파 간첩 성시백을 ‘열사’로 표현하는 등 그의 일대기를 극찬한 노동신문 1997년 5월 26일 보도.
남파 간첩 성시백을 ‘열사’로 표현하는 등 그의 일대기를 극찬한 노동신문 1997년 5월 26일 보도.
백범은 통일을 위해 몸을 던지면서도 공산주의자의 속성을 모르고, 간첩인지도 모르고, 김일성의 통일전선전술에 당했을 수 있다. 공산주의자에게 속았다고 하면 폄훼인가? 백범이 속을 리 없다는 건가? 대체 왜 태영호가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 ‘태어나선 안 될 나라’ 좌파의 역사왜곡
‘그들’이 교묘하게 전개하는 역사전쟁의 틀이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통일을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외면하고 미국을 끌어들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웠다는 거다. 이것이 1948년 이래 오늘까지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김일성 패거리의 건국사 왜곡 담론이라고 이영일 헌정회 통일특위원장은 최근 저서 ‘건국사 재인식’에서 지적했다.

이런 논리라면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다. 김구는 단독정부 반대하고 협상통일 부르짖다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게 피살된 위대한 민족지도자다. 소련은 이미 1946년 2월 위성정권으로 북한에 단독정부(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세웠는데 이런 북의 반민족적 책동은 그냥 가려진다.

즉 우리나라는 태어나선 안 될 나라, 북조선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으로 해방된 정통성 있는 나라라는 지긋지긋한 좌파 역사관이 그대로 살아나는 거다. 이렇게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선 함부로 말해도 되지만 백범은 거의 성역이다. 태영호는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이 나라에 왔다.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할 자유를 뺏는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2023년 3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탑골공원 3.1운동 성역화 기념식에서 만난 김구 선생의 손자 김진(왼쪽) 씨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의 부인 조혜자 여사(오른쪽)가 손을 맞잡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국힘은 나라 정통성 지킬 수 있나
이제 국힘에 묻고 싶다. 시시비비도 안 따지고, 사안의 경중(輕重)도 모르면서, 우리 근현대사를 잘 아는 것 같지도 않고, 정통성도, 민생도, 국민의 생명과 안보도 지키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을 지키겠다고 당신들은 정권을 잡은 것인가(아…미안. ‘나의 기득권’이라고 말하지 마시길. 그리고 암만 못해도 이재명의 민주당보단 낫다고도 하지 마시길).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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