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북핵 불용” 문 대통령은 왜 말 못 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1일 1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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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당국에 촉구합니다. 북한의 핵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11일 신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끝까지 이 말을 하지 않았다. 북한 김정은이 9일 한국을 겨냥해 “핵무기의 소형경량화, 전술무기화를 보다 발전시키라”며 전술핵무기 개발을 지시한 직후다. 김정은은 “강력한 국방력에 의거해 조국 통일을 앞당기겠다”고 대한민국을 위협했다.

사거리가 짧은 전술핵무기는 한국을 겨냥한다(일본에도 사용할 수 있겠지만 북한이 미쳤다고 일본에 전쟁 걸겠나). 전술핵 개발을 김정은이 공개 지시한 것도 처음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남북 비대면 대화를 제안한 문 대통령은 한반도 아닌 천상(天上)의 대통령 같았다. 국민 세금이 들어간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해도, 우리 공무원을 쏴죽이고 불태워 죽여도 ‘전쟁 불용’ ‘상호 간 안전보장’ ‘공동번영’이 3대 원칙이라고 했다. 북핵 불용이 아니고 전쟁 불용? 그럼 핵은 용인할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이 지난해 10월 공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노동신문 뉴스1
북한이 지난해 10월 공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노동신문 뉴스1

● ‘북의 비핵화 의지’ 文은 답변 피했다

궁금하지만 대통령한테 물을 수도 없다. 기자회견을 이어서 하면 신년사가 주목받지 못한다며 질문도 안 받아서다. 그러나 지난해 신년회견 때도 대통령은 답하지 않았다. 첫 질문이 “김정은의 비핵화, 그리고 김정은의 답방을 여전히 신뢰하느냐”는 것인데 대통령은 묻지도 않은 북-미 간 신뢰에 대해 한참 말했을 뿐, 김정은의 비핵화(의지)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양 정상 간의 신뢰는 계속되고 있고… 저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고 싶다… 남북관계도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대화를 통해서 협력을 늘려나가려는 그런 노력들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제대로 된 기자회견이라면 “그래서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보느냐”고 재차 물었어야 했다(이번 기자회견에선 제발 보충질문을 하기 바란다). 대통령이 일부러 핵심을 피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없고, 비핵화하지도 않을 것을 대통령도 알기에 답변을 피했다면 국민을 속인 것과 다름없다.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 모습을 나타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노동신문 뉴스1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 모습을 나타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노동신문 뉴스1

● ‘북핵 불용’에서 ‘전쟁 불용’으로 바뀐 원칙
문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7년 10·4남북공동선언 10주년 기념식에서 “북한의 핵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북한이 무모한 선택을 중단한다면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은 항상 열려 있다”고 대화를 강조한 거다. 한 달 뒤 국회 시정연설에서 밝힌 한반도 안보 5대 원칙에도 ‘북핵 불용’은 당연히 포함돼 있었다.

‘북핵 불용’이라는 단어는 2018년 4월 1차 남북정상회담 합의에서 사라진다. 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과 합의한 것은 △남북관계 전면적 개선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전쟁 위협 해소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와 전쟁 불용이었다. 북에서 말하는 비핵화는 북핵 폐기가 아님을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주한미군 철수는 물론 한반도 핵우산 보장 철회, 일본과 괌에 있는 미국 핵무기 철수까지 포함된다.

실은 이보다 넉 달 전, 문 대통령 중국 방문 때 이미 ‘북핵 불용’은 실종됐다. 두 정상이 의견을 같이했다는 한반도의 평화·안정을 위한 4가지 원칙이 △전쟁 불용 △비핵화 견지 △북핵의 평화적 해결 △남북관계 개선이다. 만일 문 대통령이 중국에서 어떤 압력(또는 영감)을 받아 ‘북핵 불용’ 입장을 ‘전쟁 불용’으로 바꿨고, 남북회담에서도 그렇게 합의한 것이라면 충격적이다.

● 국민과 세계를 속여 선거 이기니 좋은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중요한 것은, 북-미 사이에서 한국이 그걸 보장했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정의용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을 만나고 돌아와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국민 앞에 밝혔다. 이때 ‘김정은’이 아니라 ‘북측’이라고 밝혔다는 데 유의하기 바란다.

정의용은 이 결과를 들고 트럼프를 만난 뒤 “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언급하였다’고 했다”고 브리핑했다. 김정은이 자기 입으로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고 정의용은 세계에 천명을 한 것이다. 정의용이 속였는지, 그의 상관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인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남북미 정상. 동아일보 DB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남북미 정상. 동아일보 DB

그 다음은 거짓 약속에 속은 더러운 사랑의 역사다. 햇볕정책의 상대는 철갑을 두르다가 전술핵무기까지 개발하는데 이쪽은 스스로 옷을 벗다 못해 무장해제로 가는 추세다. 2018년 문 정권은 국민과 미국과 북한을 각각 듣기 좋은 소리로 속인 결과 지방선거에서 벼락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4월 재·보궐 선거와 내년 대선 때 비슷한 북한 쇼는 안 통할 것이다. 만일 문 대통령이 “북핵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대북정책을 완전히 바꾼다면 또 모르지만.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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