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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감사원장 최재형의 절묘한 정치감각

김순덕 대기자 입력 2020-10-21 14:57수정 2020-10-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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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하다면 절묘할 수도 있는 결론이다. 감사원은 20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조기폐쇄 결정의 타당성 점검’ 감사보고서에서 조기폐쇄 결정의 핵심 근거는 조작됐지만 폐쇄 결정이 타당한지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발표했다. 음주측정 조작을 밝혀내고도 운전면허 박탈이 부당한지에 대해선 여러 사정을 감안해 덮은 셈이다.

틀린 결론이라고 하긴 어렵다. 운전자 집안 분위기에 따르면 운전을 하는 데는 맑은 정신 외에 안전성이나 주변 수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대통령이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이면 따르는 거지 무슨 근거가 필요하겠나.

최재형 감사원장이 15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감사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 감사원장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이지

15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꼿꼿 재형’으로 기대를 모았던 최재형 감사원장(64)이 이런 매가리 없는 감사 결과를 내놓은 게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보고서 제목이 ‘조기폐쇄 결정의 타당성 점검’이면 타당한지 부당한지 밝혀야 옳지, 달랑 경제성 평가만 해놓고 타당성 판단 불가라니 비겁하다, 라고 나는 혼자 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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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감에서 최재형은 모처럼 진검(眞劍) 공직자 같은 모습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월성 1호기는) 53회 정지했다”고 던지자 최재형은 “정지가 안 되는 게 문제이지 문제 있을 때 정지한다는 것을 꼭 안전성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멋지게 받아넘겼다. 2019년 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안전성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라며 월성 1호기 영구 정지를 발표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감사원 내부에선 “외부 압력이나 회유에 순치된 감사원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며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했다는 최재형이다. “이렇게 심한 감사 저항은 처음”이라고 토로할 만큼 385일이나 ‘감사 투쟁’을 하고도 맹탕 보고서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면, 최재형은 “문재인 정권의 집요한 감사 방해를 고발한다”며 분연히 떨쳐 일어났어야 했다. 그가 감사원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대정부 투쟁에 나선다면, 김영삼(YS) 정부 때 이회창 감사원장처럼 단박에 국민의 희망이 될 게 틀림없다고 나는 상상했다.

경북 경주시 월성 원자력발전소에 운전이 영구 정지된 ‘월성 1호기’(점선 안)가 서 있다. 경주=뉴시스


● ‘대쪽 회창’이 대선주자로 떠오른 이유

그런데 자료를 뒤져보니 이회창이 박차고 나온 건 감사원장이 아니라 국무총리 자리였다(사람의 기억력은 이렇게 불확실하다).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 이회창은 ‘성역 없는 감사’를 강조하며 청와대와 안기부까지 감사한 ‘대쪽’이었다. 1993년 7월엔 방위산업 관련 율곡비리 감사 때는 YS가 “정치보복으로 비칠 수 있다”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조사를 반대했으나 이회창은 흔들리지 않았다.

“감사원이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고 독립성을 지키면서 엄정하게 업무를 집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법치주의에 충실한 새 정부의 이미지로 부각될 것이고, 이것이 일시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대통령에게도 플러스가 된다고 믿었다”는 ‘이회창 회고록’ 구절은 지금 최재형의 감사원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YS는 물론 YS의 가신들에게도 이회창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1993년 말 그는 YS로부터 국무총리 제의를 받고는 “순간적으로 나는 대통령이 나에게 총리로서의 능력 발휘를 기대하기보다도 나를 감사원장 자리에서 옮기기 위해 이런 제의를 한 것이라고 직감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감사원장이나 대법원장과는 달리 총리는 대통령의 지휘명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지시를 받기는커녕 ‘법대로’ 내각 통할을 원했던 대쪽 총리에 YS는 격노했고, 결국 이회창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대선 주자로 떴다.

이회창 전 국무총리. 동아일보 DB


● 생각도 다르고, 신뢰도 없는 사람과 일할 때


안타깝게도 이회창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대쪽이라는 특성이 감사원장이나 대법원장으로는 적격일지언정 정치인으로선 안 어울린다. 특히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고 믿는 적화 증후군(enemyfying syndrome)이 만연한 우리나라에선 생각도 다르고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과도 협력해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이 긴요하다. 최재형은 감사원장 자리에서 바로 그런 능력을 발휘했다. 국민적 의혹을 규명하면서도 정권의 비위는 거스르지 않는 보고서를 내놓은 것이다.

만일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가 부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여권에서 당장 감사원장 사퇴 압력이 몰아쳤을 것이다. 반대로 조기 폐쇄가 타당했다는 결론이면, 야당에서 “감사원이 정권 앞에 엎드렸다”며 공격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최재형의 이번 결론엔 여야가 모두 만족했다. 감사원장까지 6명의 감사위원 중 확실한 친여 위원이 3명인 합의제 기관에서 모두가 참을 만한 결론을 내려면 리더의 정치적 능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최재형은 눈 밝은 국민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개입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월성 1호기 영구 가동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이냐”는 취지로 물은 것이 백운규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움직였음을 적시함으로써 향후 세상이 바뀔 경우 문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끔 기록해둔 것이다.




● 그 자리에서 직분을 다하는 공직자 만세!
최재형은 국감에서 여권의 공세에 대해 “전혀 핍박이나 압력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게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며 쿨한 모습이었다. “제2의 윤석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는 야권의 ‘떠보기’에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인기를 실감 못 하는 아이돌처럼 답했다. 정치권에선 판사 출신이고 원칙론자인 그로선 일단 감사원장 임기를 무사히 마치는 것이 목표일 거라고 보는 모양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삼권분립이 무너진 이 나라에 아직 감사원이 살아있다는 건 중요하다.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태와 관련해 금융감독원 감사 역시 월성 1호기처럼 파고든다면 ‘윤석열 검찰’을 대신해 정권 실세의 개입을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국방부와 사법부, 심지어 청와대에 대한 추상같은 직무 감찰을 통해 현재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정권 비리를 기록에 남길지도 모른다. 정 안 되면 그 자리에서 김오수 전 법무부 차관 같은 친문인사의 감사원 진입을 막는 것만으로도 최재형은 밥값을 한다(이회창 역시 낙하산 인사를 막는 것으로 감사원 독립성을 지켜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최재형처럼 그 자리에서 직분을 다하는, 공선사후(公先私後)를 당연하게 여기는 공직자가 있다면 나는 희망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 말까지 감사원장 4년 임기를 채운 뒤 더 큰 공직에 나선다면, 그건 그의 운명이다. 6·25전쟁 때 대한해협 해전에서 나라를 지킨 부친 최영섭처럼 그 역시 백척간두 위기에서 나라를 지킬지 누가 아는가.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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