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초상으로 록펠러를 뒤집다… 멕시코를 ‘미술 강국’ 만든 벽화 거장[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6월 21일 23시 00분


예술가-자본가의 위태로운 협업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예술궁전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작업하다 철거된 ‘교차로에 선 인간’을 다시 제작한 것이다. 록펠러센터 작업 당시 논란을 빚은 레닌 초상화(오른쪽 사진)를 살리고, 벽화를 의뢰했다가 철거한 록펠러 가문의 존 D 록펠러 2세(왼쪽 사진)에 대한 조롱도 담았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예술궁전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작업하다 철거된 ‘교차로에 선 인간’을 다시 제작한 것이다. 록펠러센터 작업 당시 논란을 빚은 레닌 초상화(오른쪽 사진)를 살리고, 벽화를 의뢰했다가 철거한 록펠러 가문의 존 D 록펠러 2세(왼쪽 사진)에 대한 조롱도 담았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월드컵 열기가 하루하루 뜨거워지는 것 같아 축구 애호가로서 기쁘다.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성적이 어느 때보다 기대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금 조별리그가 열리고 있는 멕시코가 한국 월드컵 도전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월드컵 첫 득점, 첫 승점 모두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얻었다. 이때부터 지난 40년간 한국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지금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축구 강국을 자부하지만, 뼈아픈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월드컵 역사상 최다 골 차 패배가 그것이다. 한국은 처음 참가한 1954 스위스 대회 첫 경기에서 0-9로 헝가리에 패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공동 최다 골 차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헝가리가 엘살바도르를 10-1로 이긴 후 최다 실점의 오명을 벗었을 뿐.

그런데 당시 사정을 살펴보면 이 기록이 그다지 부끄럽지만은 않다. 6·25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한국은 일본을 격파하고 아시아에 부여된 본선 진출권 1장을 따낸다. 그런데 월드컵이 열리는 스위스까지 가기 위해 미국 군용기를 얻어 타는 등 50여 시간의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첫 경기가 열리기 10시간 전에 겨우 현지에 도착했다고 하니 정상적인 경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헝가리는 당시 세계 최강팀이었다.

미술 칼럼에서 축구 얘기를 길게 꺼낸 것은 월드컵이 빚는 휴먼 드라마가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를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흔히 대회 전 “축구공은 둥글다”, “영원한 강자도 없고 영원한 약자도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는 세계사의 관전 포인트였다.

이 관점에서 현재 세계인의 시선이 쏠려 있는 멕시코가 써 내려간 빛나는 미술 역사를 소개하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0, 30년대 멕시코는 세계 미술 강국이었다.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문화적 우울과 허무주의에 빠져 있을 때, 멕시코는 오랜 독재를 종식하고 일련의 사회경제 개혁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새롭게 들어선 멕시코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멕시코의 고유한 역사와 진보적인 정치 이념을 알리기 위해 공공건물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것이 바로 ‘멕시코 벽화 운동’ 또는 ‘멕시코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33년 미국 뉴욕에서 촬영한 디에고 리베라(왼쪽)와 프리다 칼로 부부. 사진 출처 미국 뉴사우스웨일스주 미술관
1933년 미국 뉴욕에서 촬영한 디에고 리베라(왼쪽)와 프리다 칼로 부부. 사진 출처 미국 뉴사우스웨일스주 미술관

그 대표 작가로 디에고 리베라가 있다. 그는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와 함께 멕시코 현대미술의 ‘위대한 3인’으로 불린다. 요즘은 멕시코의 국민화가라고 하면 프리다 칼로가 더 많이 언급되면서, 리베라는 칼로의 남편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러나 생전에 리베라가 누린 명성은 정말 대단했다. 마티스나 피카소와 동격이었다고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1931년 생존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을 처음으로 기획했는데, 첫 번째 주인공이 마티스였고 곧바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 리베라가 초대됐다.

MoMA의 설립에 깊이 관여했던 당대 미국의 최대 거부 록펠러 가문이 리베라에게 보여준 관심과 지원은 특별했다. 록펠러 가문은 뉴욕 한복판에 대규모 복합단지인 록펠러센터를 지으면서 건물의 벽화를 계획했다. 특히 1933년 중심 건물인 30 록펠러 플라자가 완공되자 이곳 로비에 벽화를 그릴 당대 최고의 작가를 제한 공모를 통해 선정하려 한다. 우선 세 명을 고른 뒤 이들로부터 아이디어를 받아 최종 1명을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록펠러센터 건립을 총괄한 넬슨 록펠러가 아버지 존 D 록펠러 2세와 어머니의 의견을 고려해 택한 작가 세 명이 바로 마티스와 피카소, 그리고 리베라였다.

그런데 세 작가 모두 이 공모전 참여를 거절한다. 마티스는 정중히 거절한다는 답변을 보냈고, 피카소는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리베라는 참여는 거절했지만, 아이디어 스케치 한 장은 보냈다고 한다. 이 스케치 덕분인지 록펠러 벽화 프로젝트는 리베라에게 맡겨졌다. 제작비는 2만1000달러(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8억2000만 원). 총 3∼4개월의 제작 기간을 고려하면 적은 돈은 아니었다.

리베라는 이 프로젝트 직전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로부터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거대한 벽화를 의뢰받았는데, 이때 받은 돈이 2만5000달러라고 전해진다. 디트로이트 벽화의 제작 기간은 9개월로, 록펠러센터 벽화는 이보다 크기도 작고 제작 기간도 절반 정도로 짧아 2만1000달러라는 금액이 후해 보인다.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예술궁전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의 일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예술궁전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의 일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리베라는 1933년 3월부터 벽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벽화는 당시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1933년 4월 24일자 ‘뉴욕 월드 텔레그램’에는 “리베라가 공산주의 운동 장면을 그리고, 록펠러 2세가 이를 지원하고 있다”는 제목의 글이 실린다. 록펠러센터의 벽화에 레닌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 점이 알려지면서 거센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넬슨 록펠러가 앞서 리베라에게 준 제작 지침은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하는 희망과 고양된 비전을 가진 교차로에 선 인간”이었다. 그는 해당 부분을 다시 그릴 것을 요구하지만 리베라는 거절한다. 결국 리베라는 5월 9일부터 해당 건물에 접근이 금지된다. 거의 완성을 눈앞에 뒀던 리베라의 벽화는 일단 천으로 가려지다가 1934년 2월 9일 철거된다.

사실 리베라는 일찍부터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고, 록펠러 가문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고의 작가를 모시겠다’는 욕심으로 벽화 프로젝트를 리베라에게 맡겼으나 결국 정치적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후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와 후원자의 통제 권한을 놓고 미국 사회에 엄청난 논쟁이 일었다. 오늘날까지 록펠러센터 벽화 논란은 창작의 독립성과 후원의 영향력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아 있다.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예술궁전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의 일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예술궁전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인간, 우주의 통제자’(1934년)의 일부.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리베라는 소동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작업을 몰래 카메라에 담았고, 이를 기초로 고향 멕시코로 돌아와 재제작한다. 이것이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예술궁전 벽면에 그려진 ‘인간, 우주의 통제자’이다. 제목도 바뀌면서 크기도 변경된다. 레닌뿐만 아니라 그와 친분이 있던 트로츠키 등 여러 좌파 인물이 더 추가된다. 그리고 록펠러 가문에 대한 반감도 드러낸다. 그림 왼쪽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부분에 록펠러 2세의 초상이 추가된다. 벽화 속에서 그는 술집에서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벽화 프로젝트는 파국으로 끝났지만, 록펠러 가문은 리베라에게 약속한 돈을 모두 지불했다고 한다. 하지만 길게 보면 록펠러 가문도 금전적으로 리베라에게 제대로 보상받는다. 1931년 MoMA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리베라가 그린 그림 한 점이 록펠러 가문 컬렉션에 들어간다. ‘경쟁자’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이 작품은 2018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976만 달러(약 150억 원)에 낙찰됐다. 당시 기록으로는 중남미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벽화에 비하면 크기는 한참 작지만, 이 작품 한 점으로 벽화에 지불한 돈의 수십 배를 벌어들인 셈이다.

리베라가 일으킨 소동 때문에 록펠러 가문은 한동안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사건 덕분에 리베라의 이름값은 더 높아졌고, 그 결과 록펠러 가문이 소장한 그의 작품은 훗날 거액의 경매가로 되돌아왔다. 미술과 자본은 때때로 격하게 충돌하지만, 충돌 덕분에 미술사의 명장면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 흥미진진하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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