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오혁]남북 ‘두 국가’ 시대, 달라진 스포츠 교류의 조건

  • 동아일보

권오혁 정치부 기자
권오혁 정치부 기자
1991년 4월 29일 일본 지바(千葉)현의 닛폰 컨벤션센터. 최초의 탁구 남북 단일팀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중국팀을 3 대 2로 꺾고 우승했다. 시상식에선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반도 단일기가 게양됐다. 남북의 탁구 에이스 현정화와 리분희가 만든 ‘각본 없는 드라마’는 2012년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오래 회자됐다.

남북 단일팀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다. 스포츠로 시작해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1991년의 ‘탁구 교류’는 같은 해 9월 남북 유엔 동시 가입과 12월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등 해빙 국면의 발판이 됐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엔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과 개막식 남북 선수단 공동 입장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남북 당국 간 대화는 평양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관계가 급격히 경색되면서 스포츠 교류도 멈춰 섰다.

2023년 12월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으로 과거와 같은 남북 스포츠 교류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북한이 남한을 통일과 화해의 대상이 아닌 ‘적대국’으로 규정한 이상 스포츠 교류의 명분과 실리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당국 간의 대화는 물론이고 민간 차원의 교류마저 거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4강전 참석차 방남을 결정했다. 북한 선수단의 방남은 2018년 12월 인천에서 열린 국제탁구연맹(ITTF) 월드투어 그랜드파이널스 대회 이후 7년 5개월 만이다. 여자축구팀 기준으로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12년 만이다.

다만 정부도 이번 대회를 통해 과거와 같은 남북 대화의 계기가 마련될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 분위기다. 통일부 당국자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되 최대한 국제 대회라는 점을 존중하면서 소통하고 협력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보단 배후 지원에 집중하겠다는 취지다.

정부가 ‘로키(low-key)’ 대응에 나선 것은 북한의 방남 취소 가능성이 있는 데다 참여하더라도 남북 관계 개선 목적이 아니란 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적대적 두 국가’ 기조하에서 한국과의 경기는 ‘교전국 간의 경쟁’으로 규정되며 대남 적대 기조를 내부 주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북한이 승리할 경우 ‘체제 우월성’ 선전의 수단으로도 쓰일 것이다. 앞서 내고향축구단은 2025년 11월 12일 미얀마 양곤에서 열린 이번 대회 예선전에서 수원FC 위민을 3 대 0으로 꺾은 바 있다. 또 이번 대회에서 우승 시 100만 달러, 준우승 시 50만 달러의 상금이 있는 만큼 북한은 실리도 챙길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방문은 꽉 막힌 남북 교류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민족을 외치며 단일팀을 꾸리는 과거의 방식은 아니지만 스포츠라는 수단으로 최소한의 소통과 교류가 다시 작동할 수도 있다. 이제는 민간 대북단체 내에서도 “정부와 민간 모두 스포츠 교류를 대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은 달라진 ‘두 국가 시대’ 스포츠 교류의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울지 집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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