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신세기통신의 ‘017 패밀리 무료요금제’는 나오자마자 메가 히트를 쳤다. ‘24시간 무료 통화’는 지갑이 가벼운 청년층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새벽 내내 잠들지 않는 연인이 속출하는가 하면, 얼굴을 맞댄 가족끼리도 “어차피 공짜”라며 전화기를 들기 일쑤였다. 급격히 늘어난 통화량에 회사는 설비 확충 속도를 맞추지 못했고, 이는 통화 품질 악화로 이어졌다. 신세기통신이 경영 악화를 이기지 못하고 2001년 SK텔레콤에 인수된 여러 요인 중 ‘무료요금제’는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같은 시기 금융업계에서도 예측 실패로 인한 애물단지가 탄생한다. 1999년 나온 1세대 실손보험이다. 가입자의 자기부담금은 아예 없거나 극히 소액이었고, 적용 범위는 한마디로 ‘안 되는 게 없는’ 정도였다. 경제학이나 수학 석박사가 즐비한 보험사들이 복잡한 수식을 바탕으로 설계한 이 상품은 ‘병원 쇼핑족’이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수익성이 곤두박질했다. 동네 정형외과는 도수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사랑방’이 됐고, 이들의 치료비는 모두 보험사에 청구됐다.
▷실손보험 정책은 이후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2009년 10∼20%의 자기부담금이 생긴 2세대, 2017년 도수 치료 등 일부 비급여 항목을 기본 보장에서 제외한 3세대, 2021년 비급여 항목 전체를 특약으로만 보장하는 4세대로 각각 진화했다. 세대 전환 기간도 10년→8년→4년으로 짧아졌다. 그런데 보험금 수령자들의 의료기관 이용 행태 역시 빠르게 적응했다. 1∼4세대 실손보험의 위험손해율은 110∼150%로, 보험사들은 여전히 고객들에게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내주고 있다.
▷다수 가입자들도 속이 쓰리긴 매한가지다. 작년 실손보험 가입자의 65%가 보험료를 내기만 했을 뿐 받은 적은 없다. 보험금 수령인 상위 10%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지급액 전체의 74%가 건네졌다. 다시 말해 고객 3분의 2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소수의 병원 비용을 대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병원에 간 적도 없는데 보험료는 계속 올랐다. 이달 6일부터 나온 5세대가 비급여 항목이나 비중증 질환 치료 보장을 축소하고 자기부담금을 늘리게 된 배경이다.
▷과잉 진료나 의료 쇼핑을 제한하겠다는 목적 자체는 이번에도 달라진 게 없다. 눈에 띄는 건 1, 2세대 가입자들이 일부 보장을 빼거나 5세대로 갈아타면 30∼50% 보험료를 깎아주는 ‘반값’ 정책이다. 하지만 “이제 병원 자주 다닐 나이”라며 기존 계약을 고수하겠다는 초기 가입자들이 많다. 보험사와 병원 쇼핑족 간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은 어떤 결말로 향할까. 2010년대까지도 7만 명 이상이 이용하던 ‘017 무료통화’는 2G 서비스 종료로 ‘017’ 번호를 쓸 수 없게 된 2020년에야 완전히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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