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재성]안보도, 경제도 ‘회원제’ 시대가 왔다

  • 동아일보

이란戰 겪은 뒤 인프라 유료화 흐름은 대세
美는 전략적 이익에 기여국만 클럽에 초대
‘어디에 줄 설 것인가’ 낡은 이분법 안 통해
우리 스스로 산업-안보 공공재 생산국 돼야

전재성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전재성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란발(發) 군사·경제적 긴장이 어떠한 결말을 맺을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미국과 이란 모두 전면전으로 치닫는 확전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기에, 중재나 제한적 합의를 통한 일시적 소강 상태가 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종전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미국-이란 전쟁 이전과 이후의 국제정치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갈등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제공해 온 국제 공공재가 더 이상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없음을 알리는 결정적 경고음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한 통행은 오랫동안 세계 경제의 기본 전제였다. 중동의 에너지가 전 세계로 흐르고, 글로벌 공급망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비용을 전담한 ‘해상교통로의 안전’이라는 공공재 덕분이었다. 공공재란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소비가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지 않는 재화를 말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미국의 압도적 패권만으로 이 공공재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음을 보여줬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 스스로가 이 공공재를 ‘클럽재(Club Good)’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클럽재는 회원비를 내는 구성원들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재화다. 이제 미국은 안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해저 케이블, 첨단 반도체 공급망,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등을 더 이상 보편적 가치로 보지 않는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기여하는 국가들만 클럽에 초대받고, 그러지 못하는 국가들은 배제되거나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거래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정책적 변심이 아닌, 미국의 깊은 국내 정치적 위기에서 비롯됐다. 지난 수십 년간의 세계화는 대도시 엘리트와 금융·기술자본에 혜택을 집중시킨 반면, 제조업 노동자와 지방의 하층민을 소외시켰다. 이른바 ‘지구화 패자’들의 분노는 트럼프주의로 대표되는 포퓰리즘의 기반이 됐다.

민주주의 국가가 내부의 불평등과 산업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유권자들은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적대적인 정권을 선택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국민의 불만을 대변하겠다고 등장한 이들은 국제적 공공재 제공을 국부 유출로 규정하고, 동맹을 철저히 거래적 관점에서 다룬다. 민주주의가 오히려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해체하는 이 구조적 모순은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국제 정치의 새로운 상수가 됐다.

한국은 냉혹한 클럽재의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핵심은 더 이상 미국이 베푸는 안보 우산 아래에 머무는 수혜자에 그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진 대체 불가능한 자산을 투입해 공공재 제공자 클럽에 불가결한 주주로 참여해야 한다.

첫째, 기술과 공급망의 노드(Node·네트워크의 기본 구성 단위)를 점유해야 한다.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AI) 표준 설정 과정에서 한국 없이는 클럽 자체가 작동하지 않게 만드는 린치핀(linchpin·핵심축) 전략이 필요하다. 산업 역량의 외교 자산화다.

둘째, 해상 안보의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호르무즈 해협이나 남중국해의 안전을 미국의 선의에만 맡기지 말고, 중견국들과의 다자 간 협력을 통해 우리 스스로 해상 수송로 보호의 주체가 돼야 한다. 유사시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부권과 우선권을 확보하는 길이다.

셋째, 미국은 한국에 필수적이지만 고비용인 파트너가 될 것이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 억제력과 글로벌 금융망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종신 계약이 아닌 건별 프로젝트 단위로 협력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의 성격을 띠어 가고 있다. 동시에 소다자주의 클럽을 강화해야 한다. 유럽연합(EU), 호주, 인도, 캐나다 등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전략적 자율성을 갈망하는 중견국들과 연대해 제2의 클럽을 구축해야 한다. 우리가 독자적인 협력 클럽을 가지고 있을 때, 역설적으로 미 주도의 클럽에서도 우리의 협상력은 극대화된다.

호르무즈 이후의 국제 정치는 이미 시작됐다. 국제 질서가 분절되고 인프라가 유료화되는 흐름은 막을 수 없는 대세다. 이제 한국의 전략은 ‘어느 쪽에 줄을 설 것인가’라는 낡은 이분법을 넘어, ‘우리가 어떤 클럽을 주도하고 어떤 가치를 제공할 것인가’라는 능동적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우방이지만, 그 우정의 무게는 이제 우리의 기여도에 따라 측정될 것이다. 에너지 안보, 디지털 표준, 해상 안전의 주역으로서 한국이 스스로 공공재를 생산하는 국가가 될 때, 우리는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배제되지 않는 생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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