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고물가에 ‘못난이 농산물’ 인기
감자-사과 등 ‘못난이 농산물’ 20∼40% 더 싸 구입 늘어
모양-크기 기준에 못 미쳐… 가성비 농산물로 자리잡아
폐기물량 줄여 환경보호도… 온라인 마켓 통해 간편 구입
유통가 관련 상품 판매 확대… 주스-스낵으로 ‘업사이클링’
《고물가시대… 저렴한 ‘못난이 농산물’ 주목
맛은 똑같은데 가격은 저렴한 ‘못난이 농산물’이 주목받고 있다. 버려질 뻔한 농산물을 소비해 환경 보호의 가치를 실천하려는 MZ세대, 고물가·고환율에 따른 장바구니 물가 부담을 줄이려는 소비자가 늘어서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박성현 씨(33)는 2주에 한 번 토요일마다 채소 꾸러미를 받는다. 박스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새송이버섯과 휘어진 당근, 알맹이 크기가 작은 양파 등이 고루 담겨 있다. 소위 ‘못난이 농산물’들이다. 못난이 농산물은 말 그대로 모양이 일정하지 않거나 크기가 기준에 맞지 않아 정상 제품에 포함되지 못한 농산물을 가리킨다. 대형마트 진열대에서 보던 ‘반듯한 상품’과는 거리가 있지만, 먹는 데는 문제가 없다.
박 씨는 “맛과 영양 차이도 거의 없다고 하니 굳이 더 많은 돈을 주고 모양이 예쁜 채소를 고집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했다. 이어 “고물가 상황에서 식재료 부담을 줄이면서도 품질을 유지할 수 있고, 버려질 농산물이 소비된다는 점도 의미 있게 느껴져 계속 이용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외형 기준에서 밀려났던 ‘못난이 농산물’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며 식탁 위로 올라오고 있다. 과거에는 유통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채 산지에서 폐기되거나 헐값에 처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고물가로 인해 가격 대비 품질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외형보다는 맛과 영양을 기준으로 농산물을 선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여기에 정기구독 서비스, 대형마트 할인 판매, 온라인 소포장 상품 등 판매 창구가 확대되면서, 못난이 농산물은 더 이상 예외적 상품이 아닌 하나의 소비 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 버려지던 5조 원어치 ‘못난이’ 살린다
가성비를 중시하는 MZ(밀레니얼+Z)세대 소비자들은 ‘어글리어스’와 같은 못난이 농산물 유통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어글리어스는 제철 채소나 과일을 직접 큐레이션한 박스를 정기 배송한다. 소비자는 매번 다른 구성의 채소를 받아 제철 식재료를 자연스럽게 소비하게 되고, 생산자는 판로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이 서비스는 현재 누적 가입자 80만 명을 돌파했고, 협업 농가 790여 곳과 협력하고 있다. 누적 유통량은 420만 kg에 이른다.
농산물은 자연에서 자라기 때문에 크기와 색,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정상이다. 특히 감자, 고구마, 당근처럼 땅속에서 자라는 작물은 수확 전까지 형태를 알 수 없어 비규격 상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글리어스를 운영하는 최현주 캐비지 대표(37)에 따르면 전 세계 약 30% 농산물이 못난이 농산물로 분류된다. 국내의 경우 2018년 농림축산식품부가 27개 채소·과일 품목을 대상으로 전국 128개 산지 농협을 조사했을 당시 비정형과(못난이 농산물) 발생률은 평균 11.8%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 중 상당량이 소비되지 못하고 폐기된다는 점이다. 농가 입장에서는 손실이며, 이미 투입된 물과 비료, 에너지, 노동력도 함께 낭비된다. 국내에서는 통상 연간 5조 원어치 농산물이 규격 미달로 버려지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13억 t의 식품이 폐기되고 있으며, 이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8∼10%를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최 대표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산지 농가와 협력하며 2020년 10월 어글리어스를 만들었다. 최 대표는 “못난이 농산물은 수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연결되는 유통 구조가 부족했던 것이 문제”라며 “정기배송을 통해 수요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산지 직거래를 병행해 유통 단계를 줄이면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취급하는 농산물의 90%가 유기농·무농약 등 친환경 농산물인데, 중간 유통 과정을 줄이면서 시중가 대비 평균 20∼30%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고물가-가치소비 맞물려… “모양보다 실속”
못난이 농산물은 고물가가 장기화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식재료 구매에서도 가격 대비 품질을 따지는 ‘가성비’ 소비가 확산되면서 외형보다 맛과 영양, 신선도를 기준으로 농산물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여기에 소비를 통해 환경 보호와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려는 ‘미닝아웃(Meaning out)’ 트렌드도 영향을 미쳤다. 버려질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음식물 폐기를 줄이고 환경 부담을 낮춘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특히 유기농·무농약 등 친환경 농산물 비중이 높은 점도 소비 확대 요인으로 꼽힌다. 친환경 농산물은 화학 비료나 성장 촉진제를 사용하지 않아 외형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기존 유통 구조에서는 오히려 ‘못난이’로 분류돼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품질 중심 소비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이 실시한 못난이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 의식 조사 결과 응답자의 60.5%가 못난이 농산물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구매한 이유로 ‘가격이 저렴하다’고 답한 응답자가 46.4%로 가장 많았다. 또 55.6%가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접근성이 개선돼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15일 서울 중구 롯데마트 제타플러스 서울역점을 방문한 고객이 못난이 상품으로 나온 제주 무를 살펴보고 있다. 롯데마트 제공유통업계는 못난이 농산물을 더 이상 ‘폐기 대상’이 아니라 ‘가격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보고 있다. 롯데마트는 외형에 흠이 있는 농산물 10개 품목을 ‘상생 채소’와 ‘상생 과일’로 판매하고 있다. 일반 상품 대비 최대 30%가량 저렴하다. 1월에는 상품성이 떨어진 제주 무 120t을 매입해 시세의 절반 수준 가격에 판매했다. 못난이 농산물은 2022년 매출이 전년 대비 200% 증가한 이후 매년 증가 추세이며, 올해 1분기(1∼3월)에도 전년 동기 대비 28% 판매량이 증가했다.
이마트에브리데이는 못난이 농산물을 일반 상품 대비 20∼40%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지난해 판매량은 약 689t이었고, 올해 1000t까지 늘릴 계획이다. 2023년 6월 론칭한 컬리의 못난이 채소 브랜드 ‘제각각’은 올해 3월 기준 매출이 전년 대비 195% 늘었다. 양배추와 브로콜리 등을 올해 새롭게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이색 상품과 소포장 상품을 지속적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 유통 넘어 가공-외식으로 확장
지난해 7월 서울 서초구 킴스클럽 강남점 매장을 찾은 소비자들이 ‘못난이 왕사과’를 고르고 있다. 이랜드 제공못난이 농산물 활용 방식도 단순 판매를 넘어 다양해지고 있다. 이랜드 킴스클럽은 산지 직계약으로 농산물 선별 없이 다양한 농산물을 한꺼번에 매입해 가격을 낮췄다. 대표 상품인 못난이 왕사과는 일반 상품 대비 약 20% 저렴하다. 이 상품은 올해 3월 기준 전년 동기 매출이 50% 늘었다. 판매되지 않고 남은 물량은 이랜드이츠 센트럴키친으로 보내 애슐리퀸즈, 자연별곡 등 외식 브랜드 식재료로 활용한다. 현대그린푸드도 제주산 당근 300t을 매입해 ‘당근명란오일파스타’, ‘당근케이크’ 등 다양한 메뉴로 재탄생시키며 못난이 농산물 소비를 확대하고 있다.
못난이 농산물을 활용한 푸드 업사이클링도 활발하다. 푸드 업사이클링은 식품 부산물이나 상품성이 떨어지는 식품을 재가공해 새로운 제품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업사이클 식품 시장 규모는 2025년 약 608억 달러에서 2035년 1060억 달러로 연평균 약 5.7%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웰스토리는 못난이 농산물 중 사과, 배, 당근, 도라지를 활용한 건강즙인 ‘비요미’ 제품을 출시했고, CJ제일제당은 깨진 쌀과 콩비지 등 식품 부산물을 30% 이상 활용한 고단백 스낵 ‘익사이클 바삭칩’을 선보였다.
해외에서도 못난이 농산물은 이미 익숙한 트렌드다. 2018년 설립된 미스피츠 마켓(Misfits Market)은 온라인 구독 서비스를 통해 일반 식료품점보다 최대 25∼40%까지 저렴한 가격으로 ‘못난이 농산물’ 등 유기농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2016년 설립된 오드박스(Oddbox)가 못난이 농산물 정기배송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푸드 업사이클링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버려지는 바나나를 활용한 건강 스낵인 ‘발나나’가 판매되고 있으며, 캐나다 브랜드인 해피 플래닛도 완두콩과 치즈 등의 생산 부산물인 유청을 사용한 단백질 셰이크를 출시했다.
이종우 남서울대 유통마케팅학과 교수는 “고물가 장기화로 소비자들이 가격 대비 효용을 따지는 합리적 소비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농가와의 상생을 강화하려는 기업도 늘고 가공업체와의 협업도 다양한 형태로 이전보다 활발해지면서 관련 시장이 확대되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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