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남은 구독료는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출판사 운영에 써 주세요.”
월간 잡지 샘터가 경영난으로 올해 1월호(통권 671호)를 낸 후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지만 정기 구독자 중 남은 구독료를 받지 않겠다는 이가 수십 명이나 됐다. 정기 구독료는 1년에 4만8000원. 10년 치를 미리 낸 구독자는 30만 원 넘는 돈을 환불받길 고사했다.(샘터는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짜장면값보다 싸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1970년 4월 창간 당시 한 권에 100원이었다. 최근까진 4800원이었다.)
출판사는 이들에게 선물을 건넸다. 지난달 출간한 ‘56년 샘터 잊지 못할 명문장’(샘터)이다. 창간 후 56년간 샘터에 실린 글 중 100편을 추린 필사책이다.
‘56년 샘터 잊지 못할 명문장’ 책표지. 샘터 제공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독자들은 “휴간으로 오랜 친구를 잃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책이 나와 기쁘다”, “추억을 일깨워줘서 고맙다”며 반겼다.
책을 만든 한재원(41) 김윤미(40) 샘터 차장을 서울 송파구의 한 카페에서 12일 만났다. 이들은 월간 샘터에서 10년간 기자로 일했다. 한 차장은 편집장이었다. 이들은 샘터가 휴간에 들어간 후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고(故) 김재순 전 국회의장(1923~2016)이 창간한 샘터는 한창 인기를 끌 때 50만 권 이상 발행됐다. 정채봉 최인호 피천득 법정 스님 등이 기고했고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샘터 기자로 근무했다. 표지에는 김기창 장욱진 천경자 등의 작품이 실렸다. 월간지를 유지하려면 최소 5만 권은 나가야 하는데 최근 샘터의 발행 부수는 1만 권 정도였다.
월간 샘터. 김기창 장욱진 천경자 등 유명 화백들의 작품이 표지를 장식했다. 샘터 제공
지난해 10월 샘터 휴간이 결정되자 한 차장과 김 차장은 샘터에 실린 글을 모아 책을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김성구 샘터사 대표·샘터 발행인(66)에게 얘기하니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김 전 의장의 아들이다.
이들은 올해 1월호 제작을 마친 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책 만들기에 들어갔다. 한 차장이 짝수년도 샘터를, 김 차장은 홀수년도 샘터를 읽었다. 퇴근 후는 물론 주말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검토하는 작업을 2주간 이어갔다.
“정보성 글은 빼고 수필이나 독자 사연 위주로 봐서 예상보다 빨리 1차 검토를 할 수 있었어요. 가방에 3, 4권씩 넣고 지하철로 이동할 때도 봤죠.”(한 차장)
한 권은 평균 150페이지다. 1년은 1800페이지로, 56년이면 대략 10만 페이지에 달한다. 옛 책은 세로쓰기에 한자도 많아 시간이 더 걸렸다. 이들은 “10년간 샘터를 만들었지만 이렇게 열심히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웃었다.
“1970, 80년대 글은 투박하더라도 거침없고 솔직한 게 눈에 띄었어요. 정감이 있고요. 유명한 문인 뿐 아니라 일반 독자 글도 그랬어요.”(한 차장)
“문인은 좀 더 능숙하게 쓰고 독자들은 꾸밈없이 참신하게 쓴 게 많았어요.”(김 차장)
각자 후보를 추려보니 400개 가까이 뽑혔다. 두 사람 모두의 마음에 드는 글로 압축했다. 기준은 ‘진솔한 경험과 사유를 담아 오늘날 독자에게도 청정한 숨을 불어넣고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나는 문장’일 것.
“좋은 글이 많아 빼는 게 아까웠어요. 1차 검토보다 줄이는 과정이 더 오래 걸렸습니다.”(김 차장)
최종 100개를 추렸다. 정채봉 피천득 최인호 박완서 이어령 장영희 법정 스님 등 명사는 물론 학생, 주부, 식당 사장 등의 글이 실렸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를 추구하는 샘터의 기조가 담긴 것. 100개 글 중 20개는 해당 내용이 담긴 글 전체를 실었다.
“발췌문을 읽으면 앞뒤 정황이 궁금해지는 글이 있어요. 발췌문만으로도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게 했는데, 이 구절이 담긴 글을 모두 보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20편은 전체 글을 실었어요.”(한 차장)
법정스님은 샘터에 ‘산방한담’을 연재했다. 동아일보 DB
이해인 수녀는 샘터에 ‘꽃삽’ 등을 게재했다. 동아일보 DB
각 글에는 독자에게 건네는 질문을 실었다.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신영복·‘한 평 방 속의 우주’) 이 글에는 ‘올해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간직하며 살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적었다.
“문장을 읽고 쓰는데서 끝나지 않으면 좋겠더라고요. 나의 언어로 내 상황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질문을 넣었습니다.”(한 차장)
출간 시기는 2월을 넘기지 않기로 했다. 휴간으로 샘터에 관심이 있을 때 내야했기 때문이다. 샘터와 인연이 깊은 문인 가운데 이해인 수녀와 나태주 시인에게 추천사를 부탁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씀을 안 드렸는데도 두 분 모두 마음을 다해 쓰신 글을 이틀 내에 보내주셨어요. 저희 상황을 다 이해하신 것 같아 정말 감사했습니다.”(김 차장)
제목은 김 대표와 두 차장이 함께 만들었다. 부제로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 필사’를 뽑았다.
두 차장은 “샘터 휴간을 아쉬워하는 독자들에게 선물을 드린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책이 나온 후에야 휴간됐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책을 만드느라 헛헛함을 느낄 틈이 없었어요. 눈으로 책을 보니 ‘진짜 휴간했구나’ 실감되면서 허전함이 밀려왔어요.”(한 차장)
샘터 휴간 결정은 이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샘터는 경영난으로 2019년 휴간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지만 독자들의 기부와 우리은행의 후원으로 쉼 없이 출간하며 고비를 넘겼다.
“지난해 여름부터 휴간 얘기가 나왔어요. 이번에도 2019년처럼 넘어가겠구나 생각했죠.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김 차장)
“10월 회의에서 휴간이 확정되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샘터가 없어지는 것도, 기자 업무를 더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슬펐어요.”(한 차장)
최인호 작가는 소설 ‘가족’을 35년간 샘터에 연재했다. 동아일보 DB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는 샘터 기자로 일했다. 동아일보 DB
이들은 ‘당연히’ 퇴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김 대표가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는 게 어떤지 제안했다. 샘터는 잡지를 만드는 부서와 단행본을 만드는 부서로 구성된다. 기자 3명 중 막내 기자는 기자 업무를 계속 하고 싶어 떠났고 둘은 남았다.
이들은 샘터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웠다고 말한다.
“독자들이 ‘삶이 변했다.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된다는 사실이 뿌듯했습니다.”(김 차장)
“독자 사연을 보며 다양한 삶을 접했어요. 속사정을 들어보면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한 차장)
예전에 발간된 샘터를 보기 위해 종종 찾아오는 독자들을 맞는 것도 일상이었다. 독자 서비스를 전담하는 직원이 없기 때문이다.
“본인 글이 실린 샘터를 찾아달라는 어르신들이 꾸준히 오세요. 부모님이 쓴 글을 모아 책을 내려는 자녀들도 있고요. 돌아가신 부모님의 흔적을 찾는 분도 있습니다.”(김 차장)
샘터는 전체 글이 디지털로 저장돼 있지 않다. 제목, 저자, 페이지, 발간 연도와 월, 주제어 등을 정리한 엑셀 파일로 검색한 뒤 해당 책을 직접 찾아야 한다.
“여유 있을 때는 괜찮은데 마감으로 정신없을 때 독자가 오시면 솔직히 난감해요. ‘너무 바쁜데 나중에 연락드리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그래도 찾아드립니다. 샘터 이미지를 지켜야 하니까요.(웃음)”(한 차장)
김 대표는 샘터 휴간을 밝히며 “단행본으로 실력을 키우고 에너지를 충전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두 사람도 이를 고대했다.
“짧은 기간 내에 실현되긴 어렵겠지만 샘터가 복간되면 우리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단행본을 통해서도 온기를 계속 전하고 싶어요.”(김 차장)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복간되면 정말 좋겠어요. 독자에게 밝은 기운을 드리는 콘텐츠를 만들겠습니다.”(한 차장)
■‘56년 샘터 잊지 못한 명문장’(2026년·샘터)은….
1970년 4월 창간호부터 올해 1월호까지, 56년간 발행된 월간 잡지 샘터에서 오늘날에도 울림을 주는 글 100개를 추려 엮은 필사책이다. 100개 글 가운데 20개는 해당 구절이 포함된 전체 글도 실었다. 정채봉 피천득 박완서 이어령 법정 스님 장영희 이해인 나태주 한강 등 명사를 비롯해 주부 학생 식당 사장 등 일반인의 글도 고루 담았다.
‘아이들 학교로 우산을 들고 갈 일이 있을 때엔 하나라도 우산을 더 챙겨서 갑니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를 하나라도 줄이고 싶어서.’(김미라· ‘우산 세 개’)
개그맨 전유성은 ‘지금 당장 튀지 않아도 돼. 난 평생 할거니까’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인기 개그맨만큼 내가 대사가 많았던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버틴 이유가 뭘까. ‘나는 이것밖에 할 것 없다. 나는 평생 할 거니까 지금 당장 튀지 않아도 돼’ 하는 마음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글에는 독자들에게 건네는 질문도 담았다.
‘당장 필요한 것만 가지려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필요하리라 상상되는 것까지 미리 장만하려고 하기 때문에 욕망이 한없이 커지고 그 한없이 커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한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글(손봉호·‘어려운 길을 택할 때’) 아래에는 이런 질문을 썼다. ‘앞선 욕심으로 인해 현재의 일을 그르친 적은 없나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아침 중의 아침을 위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일직선으로 뻗어가는 운하가 아니라 돌에 부딪치면 돌아가는 여울이 되고, 산을 만나면 잠시 고였다가 흐르는 호수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폭포, 때로는 소용돌이가 되어 흐르는 강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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