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봉 하나로 가족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면[폴 카버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3월 17일 23시 09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최근 서구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호기심 실험’이 펼쳐지고 있다. 연구소에서나 하던 유전자(DNA) 검사 키트가 이제는 거의 임신 테스트기처럼 손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됐다. 볼 안쪽을 면봉으로 쓱 문질러 보내면 몇 주 뒤 자신의 조상, 건강 위험, 그리고 뜻밖의 친척 소식까지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해”와 “우리 진짜 뿌리는 어디일까”를 동시에 전하는 선물이다.

가벼운 웃음을 주는 발견도 있다. 예를 들어, 3% 정도의 전혀 예상치 못한 민족적 혈통을 찾거나 왕가와 먼 친척이라는 점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 있는 것은 DNA 검사가 채워지지 않은 가족 이야기와 정체성을 탐색하는 도구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입양인과 그 가족에게는 삶을 바꾸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입양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기록은 봉인되고 이야기는 불완전해 많은 입양 아동은 출생에 대한 단편적 정보만 가지고 자랐다. 일부는 출생일과 모호한 부모 정보 정도만 알고 있었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은 이러한 침묵을 점차 깨고 있다. 상업적 DNA 데이터베이스에는 수천만 명의 유전 정보가 축적돼 있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사촌을 찾거나, 입양인이 유전적 일치를 통해 친척을 찾아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순식간에 서로 다른 대륙에 살던 사람들이 연결되기도 한다.

나의 할머니는 남아프리카에서 입양됐는데 ‘충분히 백인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백인 가정에 입양됐다. 수십 년 후 아버지의 DNA 검사를 통해 우리 가족이 2% 인도 혈통임을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남아프리카로 하인으로 끌려간 인도 여성이 조상임을 알게 됐다. DNA는 우리가 몰랐던 역사를 보여줬다.

영국의 인기 방송프로그램 ‘롱 로스트 패밀리(Long Lost Family)’를 보면 수십 년 전 헤어진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감정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눈물, 어색한 첫 만남, 낯선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이 인간의 근본적 욕구를 보여준다. 한국 드라마에서도 ‘잃어버린 자식’은 단골 소재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소셜미디어에 해외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수소문하는 게시물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입양인의 정체성 문제는 복잡하다. 문화, 유산, 그리고 과거와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삶을 형성한다.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특히 절실하다. 6·25전쟁 이후 20만 명 이상이 해외로 입양돼 한국은 해외 입양의 주요 출신국이 됐다. 입양인들은 사랑받으며 성장했을 수 있지만 한국 언어와 문화를 접하지 못한 채 자란 경우가 많다. 성인이 된 뒤 많은 입양인들은 ‘뿌리’에 대한 느낌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일부는 친부모를 만나고, 일부는 언어와 문화를 경험하고, 또 일부는 어린 시절 자신을 둘러싼 배경을 이해하려 한다.

점점 DNA 검사가 이러한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록이 불완전하거나 접근할 수 없을 때 유전 정보는 또 다른 길을 제공한다. 먼 친척이 자신의 DNA를 등록하면 수십 년 동안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연결된다. 마치 디지털 시대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강렬하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입양인이 친가를 찾는 마음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수십 년의 간극, 불확실한 시간, 그리고 연결에 대한 희망… 가족을 향한 그리움은 국경과 상황을 넘어선다.

물론 모든 탐색이 눈물의 재회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단편적 정보만 제공하고, 일부는 오랜 비밀이 드러날까 봐 만남 자체를 꺼릴 수 있다. 현실은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큰 변화를 보여준다. 이전 세대가 꿈꾸기만 했던 자신의 기원을 탐색할 수 있는 도구가 이제 존재한다. 약간의 인내와 면봉 하나로 과거의 수수께끼를 탐색할 수 있다.

한국 입양인이 출생국을 찾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다. ‘속한 곳’을 찾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왔을까? 누구를 닮았을까? 나 이전에 존재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왜 나를 키우지 않았을까? DNA 키트가 모든 질문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삶을 형성하는 경험, 관계, 기억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출발점이 돼 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DNA 검사를 통해 단군신화와 하나의 혈통 신화가 깨질 수도 있지만, 자신과의 연결을 이해하고 입양인과 먼 친척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하다. 그러니 DNA 등록을 한번 고려해 보면 어떨까. 때로는 면봉 하나가 삶을 바꿀 뜻깊은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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