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한의 메디컬 리포트]침대 밖으로 나와야 산다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2월 19일 23시 09분


일본의 대부분 요양병원과 회복기 재활병원에선 환자의 빠른 회복을 위해 병실 밖에서 식사를 제공한다. 일본 요나고에 있는 가이케 온천병원에서는 환자 이름이 적힌 지정석을 갖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일본의 대부분 요양병원과 회복기 재활병원에선 환자의 빠른 회복을 위해 병실 밖에서 식사를 제공한다. 일본 요나고에 있는 가이케 온천병원에서는 환자 이름이 적힌 지정석을 갖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세계에서 노인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일본의 요양병원이나 회복기 재활병원을 방문하면 한국과는 사뭇 다른 생경한 풍경이 눈에 띈다. 환자들이 식사 시간이 되면 예외 없이 병실 밖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일본 재활시설은 층마다 쾌적한 식당을 갖춘 곳이 많고, 식탁엔 환자 이름이 적힌 지정석이 마련돼 있다. 환자는 건강 상태에 따라 세심하게 준비된 맞춤형 식단을 제공받는다.

반면 한국에선 환자 대부분이 하루 종일 누워 있는 병상 위에서 간이 식탁을 펴고 식사를 해결한다. 거동이 불편하고 몸을 가누기 힘든 환자 입장에서는 굳이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이 방식이 편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보호자나 간병인 역시 환자를 부축해 식당까지 이동시키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으니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본 병원들이 환자를 굳이 휠체어에 태우거나 부축해 식당으로 나오게 하는 데는 명확한 의학적 이유가 있다. ‘환자의 빠른 회복’이라는 재활의 본질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침상에 누워 수동적으로 받아먹는 식사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 식당까지 이동한 뒤 바른 자세로 앉아 먹는 식사는 회복 속도 면에서 천양지차다. 스스로 움직이려는 의지를 자극하고 신체 활동을 유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재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자기 결정권과 활동성 유지’를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환자 회복을 위한 또 하나의 핵심 원칙은 ‘탈(脫)부착’이다. 특히 뇌중풍(뇌졸중)이나 급성 손상 환자가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하기 위해서는 몸에 부착된 각종 보조 장치를 가급적 빨리 제거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유동식을 공급하기 위해 코를 통해 위까지 삽입하는 ‘L튜브(콧줄)’다. 환자가 의식이 없거나 뇌 손상으로 음식을 삼킬 수 없을 때 영양 공급을 하기 위한 필수 장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콧줄을 오래 유지할수록 환자의 회복은 더뎌진다.

우봉식 아이엠재활병원 병원장(대한회복기재활학회 이사장)은 “입으로 음식을 직접 씹고 맛보는 동작 자체가 뇌에 강력한 자극을 전달하며, 이는 특히 뇌 손상 환자들의 신경가소성(자극과 경험, 학습 등을 통해 발생하는 뇌의 기능적, 구조적 변화)을 촉진해 회복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재활 의학계는 환자의 삼키는 능력을 정밀하게 파악하는 ‘연하 검사’를 중시한다. 검사를 통해 환자의 삼킴 기능이 일정 수준으로 회복된 것이 확인되면, 즉시 콧줄을 제거하고 입으로 직접 식사하는 훈련을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영양 섭취를 넘어 뇌 기능을 깨우는 핵심 치료법이다. 배뇨관(소변줄) 역시 마찬가지다. 소변줄을 오래 차고 있을수록 요로 감염과 염증 발생 위험이 커지고, 이는 환자의 전신 상태를 악화시켜 재활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이런 선진적 재활 원칙을 적용하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동안 생소했던 ‘회복기 재활병원’이 제도화되면서 3월이면 전국적으로 70여 개의 지정 병원이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다. 주요 대상은 뇌졸중 등 뇌 손상 환자, 척수 손상 환자, 대퇴골이나 골반 골절 후 치환술을 받은 근골격계 환자, 하지 절단 환자 등이다.

이들 병원은 환자의 장애를 최소화하고 조기에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기능 회복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시기에 맞춤형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내 재활 환자들은 입원 기간 제한 때문에 2, 3개월마다 병원을 옮겨 다니며 이른바 ‘재활 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회복기 재활병원이 확충되면서 환자들이 한곳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아 가정으로 조기에 복귀할 수 있는 토대를 넓히고 있다.

회복기 재활의 활성화는 결국 건강보험 재정과 사회적 돌봄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일본이 의료비 절감을 위해 회복기 재활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은 현재 건강보험이 주도하던 의료비 체계를 장기요양보험과 연계해 효율화하는 구조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속 가능한 보건 의료 시스템을 위해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시스템 마련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대중에게 ‘회복기 재활’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다. 재활 치료를 ‘병원 퇴원 후 집에서 혼자 하는 운동’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인식 탓에 적기 치료를 놓치는 안타까운 사례가 빈번하다. 재활은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훼손된 삶의 존엄을 되찾는 과정이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의 손을 잡아 식당으로, 그리고 다시 사회로 이끄는 한 걸음이 우리 노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일본#요양병원#맞춤형 식단#환자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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