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모임에서 반드시 기념사진을 찍었다. 언제부턴가 모임에 그는 반드시 가야 하는 존재가 돼 있었다. 재경상주고 동문 가족 체육대회. 조보희씨 제공―보도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진기자로서 자칫 하찮아보일 수 있는 기념사진이나 기록사진을 열심히 찍는 이유는.
“본업은 열심히 했고 성과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찍어주면서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무척 즐거웠어요. 가족 행사나 친지 행사 등에서도 그렇고, 퇴직하고 나서도 동창회나 향우회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제가 빠지면 행사가 헐겁게 느껴지는지 꼭 오라는 신신당부를 받곤 합니다.”
원래 기자 지망생이었던 그는 친척 중 사진기자의 멋진 모습에 매료돼 방향을 바꿨다. 1990년 통신사에 입사한 건 우연이었지만, 업무강도가 높고 수시로 마감해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진기자로서 날개를 단 경험’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출입에서 스포츠 사진까지 사진기자가 해봐야 할 일은 모두 경험했다.
―평소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찍어놓으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 말에 무릎을 쳤습니다.
“사진이란 ‘지금, 여기’를 찍는 겁니다.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기록하고 간직하는 거죠. 기록사진은 내 인생의 여정을 기록하는 거예요.
의외로 30여 년을 일하고도 일터에서의 일상 사진이 하나도 없는 분이 많아요. 어제도 오늘도 출근하는 직장이다 보니 특별할 게 없지만 일단 퇴직하면 그날 이후로는 못 돌아오는 공간이 됩니다. 집 빼고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데도 말이죠.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겨두는 게 좋죠.”
―‘내일 내일’ 하다가 영원히 못하는 게 어쩐지 인생과 닮았네요. 그러고 보면 기록사진을 남기는 것 자체가 생에 대한 긍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맞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은 삶에 대해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들이 많아요.지금의 자신에 대한 긍정,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긍정….”
이런 활동은 모두 ‘봉사’다. 하지만 선행의 대가는 다른 방식으로도 그에게 돌아왔다. 사진 찍어주며 만난 분이 그를 좋게 보고 일자리를 제안했고 퇴직후 곧바로 신생 통신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조보희씨가 평생 찍은 자신의 증명사진들을 모아놓았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건 용모뿐일까.
‘나 이렇게 안 생겼어’
―나이드신 분들 중에 사진찍기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던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머릿속으로 인식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못 보니 과거의 모습을 생각하는데, 지금보다 젊었을 때 모습이죠. 그런데 사진 찍어 놓으면 늙은 사람이 딱 있으니까 놀라죠. ‘나 이렇게 안 생겼어’라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 모습으로 보고 있었는데 자기만 자기를 보고 놀라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과의 만남에서 생김새는 사실 아무 상관없어요. 그 사람의 표정이라든지 행동, 즐거움 뭐 이런 걸 보고 그를 느끼게 되죠. 긍정적으로 밝은 표정을 보여주면 다른 사람에게 좋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분께는 지금이 제일 젊을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오지랖일까. 나의 이 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순간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작동한다.
“며칠 전에는 출근길 횡단보도에서 젊은 아빠가 아기띠에 아기를 안고 왼손은 조금 큰 꼬마 손을 잡고 오른손엔 큰 가방을 들고 서 있더군요.
굳이 ‘사진 찍어드릴테니 핸드폰을 달라’고 말을 걸었죠. ‘지금 이 모습이 훗날 좋은 추억거리가 된다’고요. 처음엔 사양하던 젊은 아빠도 결국 핸드폰 넘겨줬어요. 하하.”
일반인의 일상기록에도 역사적 의미
―스마트폰 보급으로 누구나 사진을 많이 찍는 시대입니다. 부모님 유품 중 가장 머리 아픈 것이 앨범이라는 말도 있어요.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요.
“앨범 사진은 카메라로 복사해 파일로 만들어 보관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외장하드에 차곡차곡 쌓아서 돌아가실 때 자식에게 넘겨주세요.
저는 필요 없어진 사진이라도 없애는 것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특히 앨범에 넣어둔 아날로그 사진은 더 그렇습니다. 모든 사진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거든요.
일반인들의 일상기록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일제시대에 본인은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귀한 역사 자료가 되기도 하지요. 1세대 사진작가들의 작품 중에 가장 평가받는 것은 그 시대의 풍속이 담긴 작품들이예요.”
조보희 씨 누님의 간단 회갑연. 가까운 가족만 모여 케익의 촛불을 끄는 행사가 됐다. 회갑 주인공의 얼굴이 앳돼 보인다. 조보희 씨 제공 ―우리 현대사에도 사진이 없어 안타까운 일이 많은데요.
“예컨대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의 활약이 한국 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준 역사에 대해 우린 잘 알고 있지만 정부에는 기록사진이 없었어요. 결국 국가기록원이 개인들이 소장한 사진을 공모해 그걸로 전시도 하고 교과서에 싣곤 했지요.
한국전쟁 당시 사진은 주로 미국 종군기자들의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1960년대 한국이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은 사진이 거의 없어요. 국력이 약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기록을 남긴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전에 많은 군인이 가서 고생을 했지만 남아있는 사진이 없으니 기억에서 묻히기 쉽습니다.”
그는 퇴직하면서 자신이 30여년간 찍었던 고향집의 농사일 광경, 장례식과 동네 잔치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광이 담긴 사진들도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렸다. 충분히 자료사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장인장모 내외. 장인은 이 사진을 촬영한 지 일주일 뒤 세상을 뜨셨다. 조보희 씨 제공 ● “자신의 소중함을 들여다보세요”
―책을 내셨는데.
“가장 뿌듯했던 건 사진기자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는 흑백 필름 카메라 시절이었고 그게 컬러, 디지털로 변하면서 DSLR에서 미러리스 카메라로 넘어왔죠. 사진기자는 늘 최첨단 카메라를 썼고 2,3년마다 기종이 바뀌었는데 그런 경험을 한 세대가 별로 없어요.
그때 사용했던 카메라는 물론이고, 전송기라든지 카메라 장비들에 대해 제가 다 기록했어요. 그간 아무도 하지 않았거든요. 회사 창고에 쌓여있는 장비들이 뭔지 후배들은 모르죠.
1998년에 나온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는 당시 2500만 원이었는데 화질은 떨어지지만 마감용으로 요긴했죠. 디지털카메라가 필름 화질을 추월한 건 2010년 정도였어요.”
―퇴직하면 고향인 경북 상주에 내려가 농사 지을 생각이라고 단호히 말하시더니.
“아직 조금 이른가? 하는 생각에 좀더 서울에 남아 있습니다. 주말마다 내려가 부모님 사시던 고향집을 살피고 텃밭도 가꾸고 있어요.”
그는 말미에 젊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가장 큰 기념사진은 자신의 얼굴 모습이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하고 인생관도 바뀌고 표정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젊을 때 얼굴을 찍어 놓으세요. 핸드폰으로 크게 찍어 놓는 거죠. 1년에 하나씩 찍어놓으면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스스로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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