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임수]미국통 외교안보 라인의 잇단 기업行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25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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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미국 수도 워싱턴에 사무소를 낸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중견기업들까지 가세해 40여 개 기업이 워싱턴사무소를 운영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부터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기치를 높이 든 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의 굳건한 보호무역 장벽을 경험한 기업들이 사무소를 두고 워싱턴의 정·관계 채널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 정부가 2022년 인플레이션감축법(IRA)부터 이른바 ‘칩스법’(반도체지원법)까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위한 공격적 입법을 추진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한국 기업을 차별하는 IRA가 미 의회를 통과한 뒤에야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던 한국 정부에 의존하기보다, 자체 네트워크를 쌓아 각자도생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과 인연이 각별한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북미총괄 부사장으로, LG그룹이 15년간 백악관에 몸담았던 조 헤이긴 전 부비서실장을 워싱턴 공동사무소장으로 임명한 게 이즈음이다.

▷최근엔 현지의 ‘친한파’ 인사 대신 ‘미국통’으로 꼽히는 국내 외교안보 출신 인사를 영입해 글로벌 현안에 대응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외교부 북미과장을 거친 김일범 전 대통령실 의전비서관을 부사장으로 영입해 미국 대관 업무를 맡겼다. 아산정책연구원 워싱턴소장을 지낸 우정엽 전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도 현대차 전무로 합류한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안보 교사’로 불린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은 HD현대의 조선 지주사(HD한국조선해양) 사외이사 선임설이 돌고 있다.

▷각 기업의 ‘워싱턴 라인’들은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물밑 로비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4대 그룹의 대미 로비자금은 벌써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 워싱턴 현지 사무소들은 현재 ‘워룸’(전시 상황실)처럼 운영되며 미국의 경제·통상 정책 동향을 수집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든, 바이든 대통령 쪽이든 접촉을 최대한 늘려 선거 결과에 따른 정책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대선이 8개월 남짓 남아 변수가 많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최대 리스크다. 당선되면 취임 첫날 바이든 정부의 IRA를 폐기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미국에서 관련 공장을 가동 중인 국내 기업들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에 대한 징벌적 관세나 수출 통제의 여파도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다. 이미 각국은 트럼프의 귀환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캐나다처럼 아예 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만든 나라도 있다. 우리만 기업에 대비를 맡겨두고 사실상 손 놓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미국#외교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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