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지하생활자 인류, 낯설지 않은 디스토피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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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숲/천선란 지음/280쪽·1만5800원·자이언트북스

지상이 멸망한 뒤 지하에 갇혀버린 인류. 한정된 공간에서 인구가 포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 출산도 주거도 통제한다. 정체불명의 약을 매일 먹지 않으면 정신재활원에 잡혀간다. 열다섯 살이 된 소년 마르코는 인간 복제 연구소를 지키는 용역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따라간 마르코는 같은 용역회사에서 일하는 동갑내기 소녀 은희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다. 깊은 지하층의 재즈 바에서 나이를 속이고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꼭 거대한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매력이 있다.

마르코는 갑자기 출근을 하지 않는 은희의 집을 찾아간다. 은희는 겨우 팔 하나 정도 너비의, 좁은 집에서 몇 년 전 치매가 온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한편 회사 선배들은 원청회사와 용역업체의 계약서를 공개하고 임금을 인상하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하고 은희는 파업에 힘을 보태겠다고 나선다. ‘조급하고, 초라하고, 두려운’ 세계에서 마르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은희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지켜질 수 있을까.

책에 담긴 ‘우주늪’, ‘이끼숲’ 등 연작 소설 3편 가운데 첫머리에 실린 ‘바다눈’의 줄거리다. 기술이 발전했어도 인류 사회의 모습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 “영생에 실패했고, 뇌 정복에 실패했어. … 고작 똑같은 인간 만들고 땅이나 파고 있다니”라는 은희의 말처럼 인간은 ‘닫힌 세계’를 되풀이할 뿐이다. 같은 설정 아래 쓴 나머지 2편에서도 주인공들은 이 같은 세계와 반목하면서 성장하고, 자신들만의 길을 헤쳐 나간다.

‘천 개의 파랑’(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나인’(2022년 SF어워드 장편 부문 우수상) 등을 썼던 저자는 이번 책 ‘작가의 말’에서 “구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 조금 더 뚜렷하게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현실 세계를 옮긴 듯한 전개로 별다른 진입 장벽 없이 읽히는 것이 소설의 장점이지만 SF 장르에서 즐길 수 있는 비유의 맛은 다소 덜한 듯하다. 슬픔의 힘으로, 슬픔의 세계를 걷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디스토피아#이끼숲#인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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