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슬로건 만들었더니 ‘뒷골목 단어’ 같다는 미국인들[정미경의 이런영어 저런미국]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7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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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끝내?”
선거 필승 슬로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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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대통령-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2024년 대선 홈페이지. 바이든 대통령 친필로 “일을 끝내자! 조로부터”라고 적혀 있다. 바이든-해리스 대선 홈페이지


Let’s Finish the Job.”
(일을 끝내자)
최근 내년 대선 도전을 선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캠페인 슬로건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바이든 선거본부는 패기와 역동성을 강조한 슬로건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습니다. 우선 “신선함이 없다”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재선에 도전하는 대통령이 흔히 정할 수 있는 슬로건이라는 겁니다. 4년 동안 벌여놓은 일을 끝낸다는 것은 대통령 본인에게 중요할지 몰라도 국민들에게도 중요할지는 미지수입니다.

‘job’이라는 단어 때문에 어둠의 세계 분위기를 풍긴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조폭들이 살인 명령을 내릴 때 “hit job”(힛잡)이라고 하는 것처럼 ‘job’은 ‘범죄 건수를 올린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나치게 의식한 슬로건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슬로건과 함께 공개된 동영상에서는 첫 화면부터 2021년 워싱턴 의사당 폭력사태 장면을 나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극렬주의자들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당시의 혼란상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국민들은 피곤합니다.

짧은 구절로 메시지를 전하는 슬로건은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후보들은 유권자가 공감할 수 있는 슬로건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합니다. 미국 역사에 성공적인 대선 슬로건을 알아봤습니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어리석게도, 문제는 경제야’라고 적힌 유세 핀. 빌 클린턴 대통령 도서관 홈페이지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어리석게도, 문제는 경제야’라고 적힌 유세 핀. 빌 클린턴 대통령 도서관 홈페이지


It’s the Economy, Stupid.”
(어리석게도, 문제는 경제야)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은 캠페인을 지휘했던 선거 전략가 제임스 카빌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아칸소 주지사였던 클린턴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게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아칸소 선거본부에는 많은 운동원이 들락거렸습니다. 클린턴 선거본부는 부시 본부만큼 조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운동원들은 유권자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운동원들로부터 “캠페인 메시지가 뭐냐”라는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 머리가 아픈 카빌은 책상 앞에 3개의 메시지를 내걸었습니다. ‘변화 대 현상 유지’(Change vs more of the same), ‘어리석게도, 경제야’(The economy, stupid), ‘의료보험을 잊지 마’(Don’t forget health care)였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가 운동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자 카빌은 슬로건으로 채택했습니다. 이 슬로건으로 당시 클린턴 대통령에게 따라붙었던 제니퍼 플라워스 성추문을 잠재우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슬로건에 나오는 “stupid”는 “바보야”라고 딱히 누군가를 지칭한다기보다 “그것도 모르냐” “어리석게도”라는 탄식의 의미가 강합니다. 이후 카빌은 캠페인의 귀재로 인정을 받게 돼 영국, 이스라엘, 브라질 등 해외 선거로 진출했습니다. 이 구절은 다양하게 변형됐습니다. “It’s the deficit, stupid!”(재정적자가 문제야), “It’s the corporation, stupid!”(기업이 문제야), “It’s the voters, stupid!”(유권자가 문제야)

1940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3회 연임이 3류보다 낫다’라고 적힌 유세 핀. 위키피디아


Better a Third Termer Than a Third Rater.”
(3회 연임이 3류보다 낫다)
1940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3선에 도전했습니다. 2회 연임, 8년까지만 하고 물러나는 전통을 깨고 3선에 도전하는 대통령을 민심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건이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면돌파를 택했습니다. 마침 헨리 애셔스트 상원의원(애리조나)이 “3회 연임이 3류보다 낫다”라는 근사한 발언을 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를 공식 슬로건으로 채택했습니다. ‘third term’ ‘third rate’ 뒤에 사람을 뜻하는 ‘er’을 붙여 의인화했습니다.

‘3류’는 도전자였던 공화당의 웬델 윌키 후보를 말합니다. 민주당이었다가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지명도가 떨어졌습니다. 3류로 낙인찍힌 윌키 후보는 “No Man Is Good Three Times”(대통령을 3번 할 정도로 잘난 사람은 없다)라는 슬로건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선거는 85%의 지지를 얻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왼쪽)의 취임식. 위키피디아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왼쪽)의 취임식. 위키피디아


Don’t Change Horses Midstream.”
(강 한가운데서 말을 갈아타지 말라)
루즈벨트 대통령은 3선뿐 아니라 4선까지 성공했습니다. 4선 도전 때 슬로건은 무엇이었을까요? “강 한가운데서 말을 갈아타지 말라”였습니다. 이는 원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슬로건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두 차례 대선에서 모두 ‘horse’(말)가 들어가는 슬로건을 정했습니다. 당시 주요 교통수단이던 말을 내세워 유권자들에게 쉽게 어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860년 슬로건은 “Vote Yourself a Farm and Horses”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은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이 주요 공약이었습니다. 토지에 일정 기간 거주해 경작하면 나중에 싼 가격에 토지를 구매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링컨에게 투표하면 토지와 말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입니다.

1864년 대선에서는 “강 한가운데서 말을 갈아타지 말라”였습니다. 강은 한가운데(midstream)가 가장 깊습니다. 여기서 말을 갈아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때였습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대통령을 바꾸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훗날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 슬로건을 택한 것은 당시가 제2차 세계대전 때였기 때문입니다. 링컨의 슬로건은 명언이 돼서 오늘날에도 널리 쓰입니다. ‘change’ 대신에 ‘swap’을 써도 같은 뜻입니다. 비즈니스에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일 때 팀리더를 바꾸면 안 된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명언의 품격
1952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나는 아이크가 좋아’라고 적힌 유세 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 홈페이지
1952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나는 아이크가 좋아’라고 적힌 유세 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 홈페이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군을 이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전쟁의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대선 출마 러브콜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컬럼비아대 총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최고사령관 등을 지내며 정치와 거리를 뒀습니다. 그렇게 7년을 보낸 뒤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I Like Ike.”
(나는 아이크가 좋아)
가장 성공적인 슬로건으로 꼽히는 아이젠하워 후보의 1952년 대선 슬로건입니다. 이 구절은 사실 “나는 아이크가 좋다”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대선 슬로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공약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성공적인 슬로건으로 꼽히는 것은 3개의 짧은 단어를 통해 후보의 개인적 매력을 극대화했기 때문입니다. ‘Ike’는 아이젠하워 후보의 애칭입니다. ‘I’와 ‘Like’를 합치면 ‘Ike’라는 합성어가 됩니다. ‘Ike’와 ‘Like’는 운율이 맞아 발음하기가 쉽습니다.

이 문구는 재클린 카크런이라는 여성 비행사가 만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녀는 아이젠하워 선거 참모로 일하다가 “We Like Ike”(우리는 아이크가 좋아)라는 구절을 생각해냈습니다. 디즈니사가 선거 광고로 만드는 과정에서 “I Like Ike”로 바꿨습니다. 얼마나 반응이 좋았는지 1956년 재선 출마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still’(여전히)이라는 단어를 추가해 “I Still Like Ike”라고 슬로건을 택했습니다. 2020년 대선 때 민주당에서 출마했던 마이크 블룸버그 뉴욕 시장의 슬로건 “I Like Mike”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실전 보케 360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의 CNN 타운홀 미팅. CNN 캡처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쉬운 단어를 활용해 영어를 익히는 코너입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CNN 방송에 출연해 타운홀 미팅을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결과 부정, 의사당 폭력사태 옹호, 성추행 혐의 부인 등 기존의 거짓 주장을 되풀이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송 시간을 할애한 CNN도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방송 후 바이든 대통령이 올린 트윗입니다.

Do you want four more years of that? If you don’t, pitch in to our campaign.”
(4년 더 저런 모습을 원합니까? 아니라면 우리 캠페인에 합류하세요)
야구에서 피처는 공을 던지는 선수입니다. 동사인 ‘pitch’는 ‘던지다’라는 뜻입니다. ‘pitch in’은 ‘안으로 던져넣다’라는 뜻이 됩니다. ‘너도 나도 안으로 던져넣다’라는 것은 ‘힘을 보태다’ ‘조직의 일원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과거 농부들이 건초더미를 한군데로 던져 모으며 일을 도운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pitch’는 명사로도 많이 씁니다. 마케팅 용어 ‘sales pitch’(세일즈 피치)는 상대를 설득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런 저런 리와인드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장기 연재된 ‘정미경 기자의 이런 영어 저런 미국’ 칼럼 중에서 핵심 아이템을 선정해 그 내용 그대로 전해드리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2020년 10월 19일 소개된 캠페인 상품에 관한 내용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은 유권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양한 유세 상품을 제작 판매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선거 운동을 하고 조직을 운영합니다. 2020년 대선 때 캠페인 상품들을 소개합니다.

▶2020년 10월 19일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1019/103501789/1

2020년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허튼소리 그만해’라고 적힌 유세 핀. 백악관 홈페이지
2020년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 ‘허튼소리 그만해’라고 적힌 유세 핀. 백악관 홈페이지
후보 얼굴이 그려져 있거나 지지 문구가 쓰인 티셔츠, 머그잔, 스티커 등은 중요한 유세 도구입니다. ‘캠페인 상품’(campaign merchandise)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품들이 판매되는 도널드 트럼프, 조 바이든 후보의 공식 온라인 쇼핑몰을 들여다봤습니다.

‘You Ain’t Black’ Tee
(‘당신은 흑인 아니야’ 티셔츠)
얼마 전 바이든 후보는 흑인 대상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you ain’t black”(당신은 흑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습니다. “어느 후보를 찍어야 할지 모른다면 당신은 흑인이 아니다”라고 말한 겁니다. 흑인이라면 당연히 민주당 후보인 바이든을 찍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흑인들로부터 “우리한테 설교하지 말라”라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공화당은 곧바로 이 문구가 들어간 티셔츠를 제작해 바이든 후보를 조롱했습니다.

‘Truth over Flies’ Fly Swatter
(‘파리들을 넘어서 진실을 택하다’ 파리채)
최근 열린 부통령 후보 TV 토론의 주인공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 머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파리였습니다. 민주당은 이를 조롱하려고 파리채를 캠페인 상품으로 만들어 온라인숍에 내놓았습니다. 10달러짜리 파리채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현재 품절 상태입니다. 파리채 이름은 ‘Truth over Flies.’ 민주당 슬로건 ‘Truth over Lies’(트럼프 대통령의 수많은 거짓말을 넘어서 바이든 후보의 진실을 선택해 달라)를 살짝 바꿨습니다. 파리채는 ‘fly swatter’(플라이 스와터)라고 합니다.

‘No Malarkey’ Button
(‘허튼소리 그만해’ 단추)
바이든 후보는 “no malarkey”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malarkey’(말라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no malarkey”는 “허튼소리 그만하라”입니다. 그런데 ‘malarkey’는 구식 영어라서 젊은 세대는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후보는 아예 버튼까지 만들어 민주당 온라인숍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내친김에 버스 유세 투어 이름도 ‘No Malarkey’라고 정했습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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