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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이기홍 칼럼]주눅 든 장관들… 대통령만 보인다

입력 2023-02-03 03:00업데이트 2023-02-03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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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무역적자 등 현안 쏟아져도
앞장서 국민 설득하는 장관들 없어
尹 약속했던 책임총리·장관 어딨나
만기친람 유혹 떨치고 내각 북돋아야
이기홍 대기자이기홍 대기자
지난해 12월 21일부터 그끄저께까지 11차례로 나눠 진행된 27개 부처(위원회 포함) 신년 업무보고를 보면서 조금 놀랐다.

KTV에 공개된 9차례 보고회 영상을 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매번 원고 없이 ‘마무리 말씀’을 했는데, 발언 분량을 합하니 222분에 달했다. 보고회마다 ‘마무리 말씀’을 평균 25분가량씩 한 것이다.

우선 놀라운 것은 그 박식함이다. 한 주제가 아니라 국정의 각각 분야에 대해 원고 없이 그렇게 길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대통령이 학습능력이 워낙 뛰어나 각 부처 업무를 꿰뚫고 있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용비어천가가 아니더라도 평범한 능력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감탄과 동시에 ‘이건 윤석열의 약속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조짐인데…’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대선 선거전 초기의 장면이 떠오른다.

“대통령이 만기친람해서 모든 걸 좌지우지하지 않고 각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과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정을 시스템적으로 운영하겠다.”

2021년 10월 20일 윤석열 후보가 SNS에 올린 글이다. 그 전날 부산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자 5공 시절 김재익 경제수석이 ‘경제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유능한 인재들에게 전권을 주고 맡기겠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하며 쓴 글이다.





지난해 4월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하면서도 ‘책임총리제’를 강조했다. 5월 1일 대통령실 인선 때도 “행정부가 창의적이고 핵심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도록 대통령실은 조율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정부 출범 9개월이 다 돼 가는데 책임총리 책임장관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필자만일까.

지난 9개월간 건교부, 법무부 등을 제외하면 장관이 현안의 중심에 서서 이슈를 주도하는 모습이 기억나는 게 없다.

난방비 문제가 터져도, 무역수지 적자가 역대 최대여도 담당 장관들은 보이지 않는다. 노동, 교육 개혁을 하겠다는데 도대체 어떤 내용의 개혁을 하겠다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장관들이 사라진 원인은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금만 엇박자를 내도 대통령의 노기(怒氣)를 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한 전직 고위공무원은 지난 수개월간 집권당 사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핵관들의 여당 장악 행태와 그 과정에서 장애물들을 가혹하게 쳐내는 장면들이 공직사회에 칠링 이펙트(chilling effect·오싹해져서 움츠러드는 현상)를 줬다”는 분석이다.

대통령의 메시지들이 시스템 속에서 전략적·종합적 검토를 거쳐 정제되어 나오는지도 의문이다.

윤 대통령은 행정안전부 업무보고 때 “철밥통”이라는 표현을 썼다. 공직혁신 필요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공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공무원이 최소한 몇 퍼센트라도 있을 텐데 그들이 느낄 허탈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독립운동처럼 일하는” 공직자가 한동훈 한 사람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최고 권력자가 쓴소리나 이견 제기에 버럭 싫은 내색을 하면 결국 아무도 말을 못 하게 되는데 지금 권력 핵심부가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문 정권이 무너뜨린 국가의 펀더멘털과 핵심 가치를 세우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좌파정권 적폐, 노조 적폐, 무너진 안보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강한 그립으로 공직사회를 이끌고 가야 한다.

하지만 국정의 디테일에 대해선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을 절제해야 한다. 위에서 한마디 하면 밑에선 나비효과 태풍이 분다.

쌍방향이 아닌 소통은 소통이 아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리더십을 실(絲)에 비유했다. 실은 앞에서 살짝 끌어주면 그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뒤에서 확 밀면 구부러지고 엉킬 뿐이다.

국민은 불과 1년 전 윤 후보의 약속들을 기억하고 있다. 국정 운영에 약속과 다른 대목이 있거나 성과가 느려도 지난 정부의 잘못이 너무 크고, 국회 권력의 조직적 훼방이 크다는 걸 감안해 관용하며 인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합리적 지지층이 떨치지 못하는 불안감을 윤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총선 압승과 정권 재창출을 위한 그랜드 플랜, 즉 민생 회복과 국정 시스템 정상화, 외연 확대와 통합을 위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숨가쁠 이 귀중한 시기에 왜 대통령실은 만기친람식 행보를 하고, 왜 여당 장악이라는 곁눈질로 분란을 자초해 신뢰자산을 훼손하고 있는지 안타깝고 불안한 것이다.

정권과 여당에 대한 국민의 평가에 안개처럼 드리워 있는 이재명 문재인 효과는 오래지 않아 걷힐 것이다. 이재명 문제가 정리되면 그때부터 윤 정권과 여당엔 진정한 도전이 닥친다. 안개가 걷히면 공정과 상식의 회복이라는 약속이 이행됐는지를 적나라하게 평가받게 된다. 그 시험에서 만점을 받지 못하면 정권이 유명무실해진다는 절박감을 갖고 밤잠을 못 이뤄야 정상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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