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자형’ 집값 당분간 지속될 듯… 억지 부양은 피해야[수요논점]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규제 풀리는 부동산 시장 점검

《지난해 하반기부터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던 부동산 시장에서 새해 들어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규제지역을 대거 해제하는 ‘1·3 부동산 대책’ 이후 서울 집값 하락폭이 줄고 급매물을 중심으로 거래도 소폭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동시 하락세가 여전하고 미분양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어 당분간은 하강 국면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는 ‘경착륙’을 막겠다며 연이어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지만 자칫 투기 수요를 자극할 수 있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V자’ 반등보단 하락 후 횡보 ‘L자’ 전망 우세


올해 들어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거래 증가다. 31일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거래량(신고일 기준)은 지난해 10월 560건으로 역대 최저치를 보인 뒤 11월 733건, 12월 834건 등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1월 신고 건수는 527건인데, 매매 신고 기한이 한 달가량 남은 것을 감안하면 지난해 12월 거래량을 웃돌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집값 하락 폭의 둔화도 나타났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월 넷째 주(23일 기준) 서울 아파트값은 전주 대비 0.31% 하락해 4주 연속 낙폭이 줄어들었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민간 통계는 또 다르다. KB부동산 월간 주택가격동향에 따르면 1월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달보다 2.09% 하락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아직 바닥을 논하기엔 이른 시기”라고 말한다. 높은 집값, 금리인상 기조, 경기침체 우려 등 집값 하락을 이끌어온 요인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세 하락장은 1990년대 초,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직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3저(低·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호황’에 힘입어 1988∼1990년 3년 연속 폭등했던 집값은 1991년 하락세로 전환해 수년간 하락 내지 보합세를 이어갔다. 1기 신도시 등 공급 확대의 영향이 컸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에는 서울 집값이 15% 가까이 떨어졌다가 1년 만에 반등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집값 하락세는 외환위기 당시의 급락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금리인상 기조가 여전하고 아직 빠져야 할 거품도 많아 당시 같은 ‘V자형’ 반등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오히려 금융위기 이후 장기 침체 상황과 유사하게 흘러갈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2008년부터 내림세를 보이던 집값은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경기부양책으로 일시 반등했지만 2010년부터 2013년 말까지 완만한 하락세가 이어졌다. 서울 강남아파트 가격이 고점보다 30∼40% 떨어지기도 했다. 집값 하락은 금융위기로 시작됐지만 미분양 적체가 해소되지 않으면서 침체가 길어졌다. 박근혜 정부 들어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을 내놓고 난 뒤 2016년에야 반등이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도 상당 기간 가격 조정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말, 내년 초까지 집값 하락세가 이어지다가 이후 오랫동안 바닥에서 횡보하는 ‘L자형’ 추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다. 하락장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길게는 2027, 2028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서울과 지방, 서울 내에서도 핵심 지역과 주변 지역 사이에 온도차도 극명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 미분양 줄고 거래 늘어야 집값 회복 가능

집값은 변수가 많아 반등 시점을 정확하게 예상하기는 어렵다. 경기, 심리, 규제 등 다양한 상황에 따라 반등 시기가 앞당겨질 수도, 3∼4년 늦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몇 가지 지표를 유심히 살피면 시장의 변곡점을 짚어낼 수 있다고 본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금리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집값에서 기준금리가 차지하는 영향은 50∼60%에 이른다. 하지만 금리 인상이 멈추더라도 여전히 금리 수준이 높은 데다 금리가 하락세로 돌아서더라도 경기침체로 매수 심리가 악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분양 추이도 지켜봐야 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1년 말 1만7710채였던 전국 미분양은 지난해 말 6만8107채로 크게 늘었다. 2009년 16만 채로 정점을 찍은 이후 점차 줄어들어 2021년 1만4000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미분양이 충분히 늘다가 다시 줄어드는 시점을 살펴봐야 한다.

시장의 수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는 거래량이다. 시장이 과거의 평균 거래량을 회복하는 수준이 되면 경기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서울 아파트의 경우 현재 1000건에 미치지 못하지만 과거 정상적인 거래량은 월 5000∼6000건 정도였다. 적어도 월 2000∼3000건은 돼야 거래 회복을 점칠 수 있다.

현재 집값과 전세금이 동시에 하락하는 추세인 만큼 전세가격 하락세가 멈춰야 집값도 반등할 수 있다. 금융위기 당시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이 동반 하락하며 전세가율이 40%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2016년 전세가율이 75%까지 높아진 뒤에야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바뀌며 매매가격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 집값 거품 빼는 게 우선…억지 떠받치기 정책 피해야

집값 반등의 전제 조건은 과거 몇 년 동안 누적됐던 거품이 충분히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미분양 증가, 깡통주택 등의 고통도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과정이다. 오히려 집값 하락을 이유로 섣불리 부양책을 쓰다가는 시장을 왜곡해 오히려 가격 조정 기간을 길어지게 할 수 있다. 실수요자를 옥죄는 불합리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과거처럼 ‘빚내서 집 사라’ 식의 대책은 피해야 한다.

정부도 거래량이나 가격 자체를 겨냥한 정책은 펴지 않겠다는 방향이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투기 세력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정부는 1월 초 규제지역을 대거 해제한 데 이어 규제지역 내 다주택자에게 주택담보대출을 허용하는 등 대출 규제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있는 다주택자의 주택 구매를 유도하겠다는 의도지만 일각에서는 자칫 현금 부자들의 투기만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도심 정비사업이나 신도시 등으로 일관된 공급 확대 신호를 시장에 주는 것도 중요하다. 주택시장이 침체된다고 해서 공급을 줄이면 이후 시장이 살아날 때 집값 급등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계획은 차질 없이 추진하면서 시장에 미칠 영향과 부작용 등을 면밀히 검토해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신중하고 단계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부동산 시장#집값#l자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