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두고간 한국인 아버지… 찾아도 ‘서류상 가족’ 슬픈 현실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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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기획]라이베리아서 온 ‘아프리칸 한국인’ 스토리
1980년대 라이베리아 건설붐 때 일하러 갔던 한국인 男노동자들
현지서 혼외 사생아 낳고 떠나… 경제적 궁핍에 인종차별 눈물
친부 찾아 한국행… 재회 어려워

지난해 12월 21일 서관우 씨가 경기 평택시에 있는 자신의 원룸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트 모양의 손짓을 하고 
있다. 관우 씨가 직접 주문 제작한 티셔츠에는 ‘한국 혼혈(hanguk_mixed)’이라는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 명이 적혀 있다. 평택=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지난해 12월 21일 서관우 씨가 경기 평택시에 있는 자신의 원룸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하트 모양의 손짓을 하고 있다. 관우 씨가 직접 주문 제작한 티셔츠에는 ‘한국 혼혈(hanguk_mixed)’이라는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 명이 적혀 있다. 평택=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제 아빠를 찾아주세요. 1980년대에 아프리카에 왔고 성은 강씨예요.”

2019년 3월 경기 안산시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 “아빠를 만나고 싶다”며 30대 초반의 남성이 찾아왔다.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라이베리아 출신인 그는 ‘서관우’라는 이름도 자기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 했다. 관우는 피부색이 흑인에 가까웠지만 분명 한국인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는 라이베리아식 억양의 영어로 나직하게 말했다. “당시 대우건설에서 라이베리아로 파견을 왔던 한국인 강모 씨를 찾고 있어요.”

“정보가 그게 다예요?” 박선영 변호사가 그에게 물었다. 관우는 서류 3장을 책상 위에 내려놨다. 라이베리아에서 가져온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자신과 어머니의 출생증명서였다. 아버지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박 변호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에서 김철수 찾기보다 막막하네.”》



아버지 찾아온 ‘아프리칸 한국인’

라이베리아. 이 낯선 아프리카 나라에 한국인 혼혈 청년들이 있다. 30여 년 전 건설 현장에 일하러 왔다가 자신의 핏줄을 남긴 채 한국으로 떠나버린 아버지…. ‘아프리카판 코피노’들의 힘겨운 ‘아빠 찾기’ 여정을 따라가 봤다.
○ “엄마, 나 왜 이렇게 생겼어요?”
1988년 라이베리아에서 태어난 관우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 사진조차 없다. 1980년대 대우건설과 협력사들은 라이베리아에 도로 등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공사를 하며 노동자들을 현지에 파견했다. 관우의 아버지 강 씨는 그때 파견된 노동자였다.

강 씨는 한국에 처자식이 있었지만 당시 18세의 고교생이던 라이베리아인 여성을 6개월간 만났다. 이 여성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강 씨는 “고향에 가족이 있어서 배 속의 아이를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1988년 관우가 태어났을 때는 강 씨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뒤였다. 강 씨는 이듬해 라이베리아에서 내전이 시작되자 관우의 어머니와 연락을 완전히 끊었다. 당시 라이베리아에는 독일과 레바논 등 여러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이 있었고 현지 여성과의 사이에 자녀를 낳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들 상당수는 그렇게 낳은 아이들을 책임진 반면 한국 남성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관우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점점 더 닮아갔다. 학교에서 아시아계 혼혈아는 관우가 유일했다. 동급생들은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밝은 그를 “주인과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놀렸다. 미국에서 해방된 노예들이 1847년 세운 나라인 라이베리아에서 이 말은 심한 욕이었다.

“엄마, 나 왜 이렇게 생겼어요?” 관우는 아홉 살이 되던 해 어머니에게 물었다. 친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어머니는 극심한 내전 속에서 간신히 생계를 꾸리며 관우를 키웠다. 관우는 “도망간 아버지가 평생 원망스러웠고 동시에 그리웠다”고 했다.

○ 유전자 검사 가는 길,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라이베리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관우는 29세가 된 2017년 한국행을 결심했다. “자라는 내내 없었던 아버지를 꼭 찾고 싶었어요. 나의 절반을 이루는 한국의 문화도 경험하고 싶었고요.”

한국에 가기 위해 몇 년간 돈을 모았지만 가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을 경유해 한국에 도착하는 항공권을 사고 나니 남은 돈은 30만 원이었다. 일단 라이베리아인 지인이 있는 광주로 내려갔다. 여러 관공서를 전전했지만 아버지 성이 강씨라는 것 외엔 아무 정보가 없어 도움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선 돈부터 벌어야 했다. 공장 일, 과수원 일, 택배 상하차, 치킨 배달 등 가리지 않고 했다. 광주, 경기 안산시, 경남 밀양시, 서울 충무로 등 전국을 오갔다. 오전 1시에 퇴근해 눈만 붙이고 오전 5시에 출근하기 일쑤였다. 짬짬이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들과 단체를 수소문해 메일을 보냈다.

2년 만인 2019년 기회가 찾아왔다. 공익 사건에 법률 지원을 제공하는 세계한인법률가회였다. 관우를 담당했던 박 변호사는 “성만 아는 30년 전 인물이라면 영영 못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3개월이 되도록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박 변호사는 평소 알고 지내던 한 경찰관의 말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출입국관리소 기록은 거의 영구적으로 남아 있어요.” 강 씨의 출입국 기록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부랴부랴 법원에 출입국관리사무소(현 출입국·외국인청) 사실조회를 신청했다. 시점도 특정하기 어려워 1980년부터 1989년까지 10년간 라이베리아에 입국한 모든 한국인의 이름을 조회하기로 했다. 2주 뒤 결과가 나왔다. 1980년대 라이베리아를 오간 강씨 성을 가진 남성은 딱 한 명이었다.

박 변호사는 특정된 강 씨의 현재 주소를 찾아 관우가 친자임을 입증하는 소송의 소장을 보냈다. 관우는 마침내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6개월 뒤 열린 첫 재판에 아버지는 출석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나를 만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구나 싶어서 좌절감이 들었어요.”

법원은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에 관우 부자의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강 씨에게도 검사를 받으러 나오라고 연락했지만 그가 응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검사 당일인 2020년 2월 관우가 법의학연구소 검사실로 가는데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 왔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노년의 남성이었다.

“혹시 한국말 잘해요?”

“조금 알아요. 그런데 Who are you(누구세요)?”

“I am your 아버지(내가 너의 아버지야).”

관우 입에서 “진짜?”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강 씨는 눈물을 흘리며 관우를 껴안았다. 강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얼굴이 나를 닮아 내 핏줄이란 걸 보자마자 알았다”고 했다. 그는 가족들이 집에 소장이 온 것을 숨겨서 재판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관우는 “아버지를 만나면 ‘당신을 30년간 미워했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너무 반갑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 전 재산 처분한 돈으로 한국 왔는데…

관우 씨는 한국인 친부를 찾았지만 국적은 여전히 라이베리아다. 비자 연장 등을 위해 출입국·외국인청을 자주 찾는데 직원들이 한국어로 응대해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평택=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관우 씨는 한국인 친부를 찾았지만 국적은 여전히 라이베리아다. 비자 연장 등을 위해 출입국·외국인청을 자주 찾는데 직원들이 한국어로 응대해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평택=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관우처럼 한국인 친부를 만나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 라이베리아에는 최소 수십 명의 한국계 사생아들이 있지만 한국 땅을 밟는 것조차 어렵다. 역시 한국인 아버지를 둔 라이베리아인 프린스 현보 심 씨(30)도 가까스로 2018년 한국에 도착했지만 이후 여정은 순탄치 않다.

현보는 1993년 라이베리아에서 의류 사업을 하던 아버지 심모 씨와 라이베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작 15세였던 어머니는 당시 40대였던 심 씨가 어머니의 가족들에게 여러 편의를 제공하며 결혼을 밀어붙이자 부모의 요구에 못 이겨 심 씨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현보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공부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싶었지만 남자에게 갇히고 말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남매를 낳았다. 심 씨는 남매에게 한국 이름을 붙였다. 어머니는 공주와 왕자처럼 자라라며 ‘프린세스’와 ‘프린스’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내전과 함께 무너졌다. 심 씨는 내전이 터지자 홀로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고 연락은 영영 끊겼다.

현보의 어머니는 내전 속에서 어린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구걸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동네 남성들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다. 현보는 “누나와 여동생은 다른 집에 맡겨졌다. 삼남매가 흩어져 살면서 남은 음식을 받아먹는 등 개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현보에게 “너희 엄마는 하얀 남자와 결혼했는데 왜 그렇게 가난하냐”고 놀렸다.

학교도 중퇴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현보는 직업훈련을 알아보다 한국에서 이뤄지는 연수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한국에 가서 아버지를 찾을 절호의 기회였다. 현보는 갖고 있던 차와 오토바이는 물론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장의 기계를 4000달러(약 508만 원)라는 헐값에 몽땅 처분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 묻고 싶었다. “왜 우리를 이런 고통 속에 살게 했나요. 우리가 100% 한국인이었어도 버렸을 건가요.”

현보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 석 자와 부산 출신이라는 점뿐이었다. 2018년 11월 연수생들의 공동 숙소가 있는 경기 의정부시에 도착하자마자 현보는 부산으로 향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영하의 한기와 낯선 풍경이 그를 맞았다. 현보는 “라이베리아에서는 사람을 찾을 때 아무에게나 물어보면 건너건너 금방 알 수 있었다. 한국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모두 바빠 보였다”고 말했다.

현보는 부산역에 내린 뒤 한동안 역 앞 광장에 멀뚱거리며 서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를 내 근처 옷 가게에 들어갔지만, 말문이 막혔다. 점원은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수상하게 쳐다볼 뿐 말도 걸지 않았다. 결국 현보는 역 주변을 한두 시간 서성이다 다시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그는 산업연수생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가까워진 한국인 동료들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은 냉담했다. “한국에선 혼외자식이 드러나는 걸 싫어해. 너희 아버지도 그럴 거야.” 전 재산을 처분하고 한국에 왔던 현보는 3개월의 연수 기간 동안 아버지에게 단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한 채 라이베리아로 돌아갔다.

○ “한국어 공부하고는 싶지만 돈은 언제 벌어요”

법적으로 친자임을 인정받는 데 성공한 관우는 이제 또 다른 벽 앞에 서 있다. 아버지 강 씨의 가족관계증명서에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국적은 라이베리아다. 두 부자는 일주일에 한두 번 통화를 하지만 강 씨의 부인과 자녀들은 관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관우의 ‘멘토’이자 경기 평택시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라이베리아 여성 크리스티나 도 씨는 기자에게 “관우가 거둔 건 슬픈 승리”라며 “현실에선 절대 만날 수 없는 서류상 가족”이라고 말했다. 그녀 역시 내전 이전에 한국인 남성을 만나 딸을 낳았지만 홀로 양육하다 2008년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

관우의 다음 목표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다. 그는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를 한국에 모셔오려면 안정적인 신분과 직장, 집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행법상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면 미성년 자녀에게 자동으로 한국 국적이 주어지지만, 성인이 된 이후 한국인의 자녀로 확인된 경우는 다르다. 관우가 한국 국적을 얻으려면 한국어 능력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하는 귀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해운업체에서 일주일에 많게는 6, 7일 일하는 관우에겐 만만치 않은 시험이다. 그는 “일이 불규칙해 새벽에 나가야 할 때도 많고 지방 곳곳을 다닌다”며 복잡한 일정표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법무부에서 운영하는 귀화 시험 응시자용 교육 프로그램도 주로 주말에 열리다 보니 주말 근무가 잦은 관우에겐 ‘그림의 떡’이다.

관우 씨의 손때가 묻은 영한-한영사전.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귀화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만 일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만만치 않다. 평택=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관우 씨의 손때가 묻은 영한-한영사전.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귀화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만 일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만만치 않다. 평택=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그의 한국어 실력은 아직 초급 수준에 머물러 있다. 3년 전 관우가 일했던 평택시의 주점 사장 윤인철 씨는 “여직원들이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걸 보고 관우도 나를 오빠라고 부르곤 했다”며 웃었다. 현재 관우의 직장 상사인 박청진 씨도 “관우는 성실한 직원이지만 가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했다.

관우는 “저도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고 싶지만 그러면 돈을 벌 수가 없다”고 했다. 관우가 사는 원룸의 책상에는 기초 한국어 학습서가 10권 넘게 쌓여 있지만 끝낸 책은 거의 없었다.

○ “두 돌 아들은 고통 안 겪게 해주고 싶어요”

관우는 2년 전부터 아프리카계 한국 혼혈아들을 알음알음 초대해 일상과 정보를 공유하는 페이스북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관우와 라이베리아에 있는 현보를 연결하는 것도 바로 이 그룹이다. 가입자는 어느덧 30명을 넘었다. 관우는 아버지를 찾기까지의 과정, 한국의 비자 발급 방법, 한국계 사생아 관련 기사 등을 매주 공유하고 있다.

정부는 이들에 대한 실태 파악을 전혀 하지 않고 않다. 법무부는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서 “아프리카 국가별 한국계 사생아 현황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한국 국민의 잘못으로 고통받아 온 청년들이 가족을 찾고 싶어도 문화적 언어적 제도적으로 거의 길이 막혀 있다는 건 분명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라이베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심현보 씨가 2021년 갓 태어난 아들을 품에 안고 있다. 심 씨는 자신과 두 누이, 아내를 버리고 고국으로 떠났던 아버지를 찾기 위해 2018년 한국에 왔다. 심현보 씨 제공
한국인 아버지와 라이베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심현보 씨가 2021년 갓 태어난 아들을 품에 안고 있다. 심 씨는 자신과 두 누이, 아내를 버리고 고국으로 떠났던 아버지를 찾기 위해 2018년 한국에 왔다. 심현보 씨 제공
현보에겐 아직 두 돌이 되지 않은 아들이 있다. “제 아들만큼은 제가 겪었던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 자랐으면 해요. 저는 전혀 누리지 못했던 한국의 교육, 복지 혜택을 제 아들은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가 한국에 가서 정착하고 싶은 이유예요.”

그는 한국에서 친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를 찾아서, 내가 당신 때문에 겪은 그 모든 역경에도 무너지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자랐다는 걸 보여줄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가 제 아내와 아들을 만났으면 해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손자에게 증명할 기회를 주고 싶어요.”


평택=이채완 기자 chaewani@donga.com
평택=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서류상 가족#아프리칸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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