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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김정은은 지금 ‘괴뢰말찌꺼기’와의 전쟁 중[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입력 2022-12-01 03:00업데이트 2022-12-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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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에선 반동사상을 퇴치한다며 거리 곳곳에 규찰대가 늘어서 주민들의 휴대전화를 검열하고 옷차림 등을 통제한다. 사진은 평양에 거주했던 크리스 페테르센클라우센이 2016년 찍어 공개한 것이다.최근 북한에선 반동사상을 퇴치한다며 거리 곳곳에 규찰대가 늘어서 주민들의 휴대전화를 검열하고 옷차림 등을 통제한다. 사진은 평양에 거주했던 크리스 페테르센클라우센이 2016년 찍어 공개한 것이다.
주성하 기자주성하 기자
최근 북한에서 44만여 어휘가 수록된 ‘조선말대사전’ 신규 편찬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최신 증보판은 2017년에 발행됐지만 ‘괴뢰말찌꺼기’를 소탕하라는 김정은의 지시가 하달됨에 따라 10∼15년마다 진행하던 증보판 발행이 황급히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입수된 김정은의 2020년 6월 19일 비준 방침 ‘괴뢰들의 말투를 본따거나 흉내내는 쓰레기들을 철저히 소탕해버리기 위한 대책과 관련한 제의서’에는 김정은이 한국 말투에 어떤 분노를 느끼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김정은은 그해 5월 13일 “청년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괴뢰 말투를 본뜨거나 흉내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국가적인 문제”라며 “괴뢰말찌꺼기들을 몽땅 불살라버리기 위한 저격전 추격전 수색전 소탕전을 전 당적, 전 국가적, 전 동맹적으로 강도 높이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또 “청년들 속에서 손전화로 말하거나 통보문을 주고받을 때 괴뢰들의 말투를 본뜨거나 흉내내는 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괴뢰들의 문화에 오염된 쓰레기들로 단정하면서 시대적으로 배척당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2020년 5월은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퍼지고, ‘니가 장군님이네’가 유행어로 뜨고 있다”는 보도가 한국 언론에 나올 때다. 김정은이 이걸 보고 분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해 12월 공포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한국의 영상물 도서 노래 그림 사진을 유입 유포한 경우 최대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조선식으로 말하거나 글을 쓰고 남조선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면 최대 노동교화형 2년을 언도할 수 있다.

지난해 상반기엔 긴급하게 ‘괴뢰말찌꺼기 자료’라는 것이 전국에 배포됐는데, 내용이 경악스럽다.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면 괴뢰 문화에 오염된 쓰레기가 된다. 오빠는 친인척 간에만 부를 수 있다. ‘친구, 여친, 남친’은 물론이고 기존에 잘만 쓰던 ‘정상회담, 수교’ 같은 단어도 괴뢰말찌꺼기로 분류돼 ‘최고위급회담, 외교관계 수립’ 등으로 써야 한다. ‘올케, 이례적, 파격적, 차원, 퍼센트, 전전긍긍’ 등도 괴뢰말찌꺼기로 분류됐다. ‘…세요 …게요 …거야 …드립니다’로 말을 끝맺어도 처벌 대상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2000년 이후 출생자가 한국이나 중국 드라마에 나왔던 이름을 쓰면 개명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세나, 채린, 자영 등 수십 개의 이름이 금지됐다.





북한 사전 편찬자들은 언제 김정은의 불호령이 또 떨어질지 몰라 밤을 새워 괴뢰말찌꺼기 분리 작업을 해야 하는 처지다. 남쪽에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한다며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에 18년 동안 450억 원 이상의 세금을 쓰고 있는데, 북한에선 민족 이질성을 목표로 탄압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발표 이후 북한 거리에는 ‘대학생규찰대’ ‘여맹규찰대’ 등 각종 규찰대들이 늘어서서 ‘손전화기(휴대전화)’ 검열을 한다. 불응하면 김정은의 방침에 불응하는 반동이 된다. 학교와 직장에서도 당 비서나 담당 보위원이 수시로 휴대전화를 검열한다.

휴대전화 검열에선 제일 먼저 주소록에 ‘오빠’라고 적힌 이름이 있는지부터 보고, 이어 ‘통보문(문자)’을 검사한다. 이제 북한에선 사생활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의 시선이 북한 미사일 발사나 김정은의 딸 같은 이슈에 머물러 있는 동안 북한 주민들은 2년 넘게 김정은의 화풀이를 받아내고 있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고삐를 늦출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지난달 19일부터 23일 사이 평양에선 전국 공안 기관 종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국보위일꾼’ 대회가 열렸다. 장성택 숙청 한 달 전인 2013년 11월에 열리고 9년 만에 다시 열리는 대회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대회에선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적 행위들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 이룩된 성과와 경험들이 소개됐다”고 한다. 공안 기관끼리 사람을 잡아들이는 방법을 공유하고,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 따르면 2018년 4월 평양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뒤늦은 후회’라는 한국 가요를 불러줄 것을 요청한 김정은부터 사형돼야 마땅하다. ‘봄이 온다’는 이름이 붙은 그 공연이 열린 뒤 북한엔 죽음의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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